아이에게 주는 사랑으로 나를 다시 채우는 시간
자식은 부모의 삶을 이어 쓰는 문장이 아니라,
각자 쓰는 한 편의 시다.
이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작은 메아리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부모, 시댁, 남편과의 건강한 적절한 거리를 찾아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까지는 그 진짜 뜻을 알지 못했다.
내가 그들의 일부분으로 존재하길 거부하고,
따로 떨어져 나와 ‘나’라는 독립체를 세우면서부터,
육아의 의미 또한 내게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사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끄럽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손이 많이 가는 작은 존재처럼만 보였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유모차 안 아기가 요란하게 울 때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그런데 내 아이들을 키우며
육아라는 긴 터널을 지나는 사이,
나는 어느새 다른 아이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다.
땡깡을 부리는 아이를 보면
우리 아이들의 예전 모습이 떠오르고,
그 속에서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지나왔을,
‘그 시절 아이였던 나'를 발견한다.
아이와 씨름하며 진이 빠진 초췌한 엄마들을 바라보면
나의 힘겨웠던 육아 과정이 겹쳐 떠올라 마음이 짠하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모습 너머에
우리 윗세대 엄마들의 더 먼 과거까지도 포개어진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굉장히 흥미로운 ‘시간 여행’이 아닐까.
매일 과거의 그 시점의 나와 다시 마주하는 일이며,
그로써 과거 어느 시절에 묶여 고착된 나 자신을
치유하여 성장시키는 값진 기회가 되는 시간여행 말이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육아를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과정’이라 말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단순한 양육이 아니라,
내가 모른 척 덮어두었던 내 안의 어둠,
그 무의식의 뿌리와 다시 연결되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아이에게 화가 날 때,
아이에 대한 불안이 올라올 때,
아이로 인해 내 삶이 기쁘거나 슬플 때,
그 순간순간들이 바로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만들어주는 타임캡슐의 역할을 한다.
나 역시 나의 아이들을 통해 매일 과거의 나와 마주하고,
오래된 기억들과 다시 연결되고 있다.
그들이 ‘나’의 분신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한때 거쳤을 법한 인간 발달의 단계를
눈앞에서 생생히 되풀이해 보여주는
거꾸로 감긴 비디오 테이프 같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나는 '과거의 나'와,
더 과거의 ‘나였던 그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아이들이
곧 과거의 ‘나’라는 뜻은 아니다.
아이들은 각자 하나의 시이며,
결코 부모의 문장을 이어 쓰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그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돌려봄으로써
‘나'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과거의 상처들에 대한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치유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현재에 단단히 발을 디디고,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Children are educated by what the grown-up is and not by his talk.”
— Carl G. Jung, The Development of Personality (1934)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존재하는 방식에 의해 교육된다.
— 칼 융, 『인격 발달』
생각해보면,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기 시작하면서부터
육아의 의미가 '나의 분신을 기르는 작업' 에서
‘흥미로운 시간여행'으로 변해갔던 것 같다.
아이가 부모인 나의 연장선이나 쓸모의 도구가 아니라,
나와는 분리된 하나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
육아는 전혀 다른 길로 열린다.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타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존재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육아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아이를 내 분신으로 붙잡으려는 순간,
그 사랑은 존중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그러나 아이를 온전한 타인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부모의 사랑은 소유에서 존중으로,
붙잡음에서 지켜봄으로 천천히 바뀌어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이가 다른 존재 라는 이 개념은,
말로 배울 수 있는 개념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나의 부모, 남편, 사회적 가치들로부터
독립적 개체로 ‘떨어져나오는 경험’을 통해
내 삶으로 직접 체득할 때서야 얻어지는 ‘존재적 감각’이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모성애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물고자 했던 그 경계를
제대로 세우고 바로 인식할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가 서로를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 때부터 육아는 고된 노동이나 희생이 아닌,
나의 성장을 위해 고안된 최고의 맞춤 프로그램이 된다.
그러나 아이와 육아의 진정한 의미는 종종 잊힌다.
“애 키워봤자 뭐하냐.”
“요즘은 딸이 최고다.”
“딸은 부모 곁에 남아주지만, 아들은 장가가면 끝이다.”
“나도 살기 힘든데, 아이는 낳아 기르면 뭐하냐.”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런 말들 속에는
아이를 ‘부모의 쓸모와 필요’로 환원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
아이의 존재 가치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잣대로 평가되는 현실이 가끔 씁쓸하다.
아이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보지 못하고,
부모의 연장선이나 물질적 자원으로만 바라본다면,
그 아이들이 삶을 통해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타인을 내 필요에 따라 쓸모와 효용으로만 가늠하는 ‘인간 수단화의 관계’를 내면화하지는 않을까.
아이는 부모의 분신도, 노후의 보험도 아니다.
쓸모의 언어는 사랑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거래의 언어다.거래의 언어 안에서는 부모도, 아이도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
거래의 언어 속에는 사랑이 없다.
아이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육아가 지닌 가장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된다.
오래 전, 심리학자 아들러는
인간의 성숙이란 자기 너머로 관심을 확장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풍토는 아이조차 ‘쓸모’의 잣대에 가두며부모가 성숙으로 가는 길을 거꾸로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때가 많다.
아이를 향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반드시 존재의 분리가 전제되어야 한다.
분리가 없는 사랑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일 뿐이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나를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를 내 상처의 보상 수단이나 욕망의 연장선으로 삼을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그런 사랑은 결국 아이를 옭아매고,
나의 삶을 복제하는 빈 껍데기로 만들 뿐이다.
정신분석가 마거릿 말러는,
아이의 발달이란 엄마와의 융합 상태에서 점차 분리되어
자기(self)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분리를 허용하지 않은 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아둘 때,
그것은 성장의 토양이 아니라 구속의 족쇄가 된다.
에리히 프롬 또한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타인의 개별성을 존중할 때만 가능하다.”
아이를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는 순간,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탈을 쓴 자기애가 되고 만다
도널드 위니콧 역시 “충분히 좋은 엄마”를 정의하며,
아이를 완전히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허용할 때 아이가 자기 자신으로 성장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심리학은 육아에 관하여 경계 없는 가족관계, 특히 자녀와 부모관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경계 없는 애착은 결국 아이를 질식시키고,
부모의 사랑마저 폭력으로 변질시킨다.
그 아이는 결국 내가 살아온 삶을 똑같이 반복하는
‘대물림’, ‘윤회’라는 굴레 안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분리 없는 사랑은 아이를 사랑의 인질로 만들어,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반복하게 한다.
아이를 나와 다른 세계를 가진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고
세상으로 놓아줄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사랑은 비로소 자기애를 넘어,
타인에게까지 닿는 진정한 사랑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제야 아이는 부모와 다른,
새로운 삶을 선택할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분리 없는 사랑은 아이와 부모 모두를 가두지만,
분리 가능한 사랑은 둘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내가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전,
아직 그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갈구하고 있던 시절,
나 또한 아이를 '나의 연장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나의 불안, 나의 결핍, 나의 모든 걱정들을
‘모성애'라는 틀을 씌워,
‘아이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 쏘아 보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는 생기를 잃으며 시들해지고,
나 또한 힘들어지는 지름길이었다는 것을
뼈아픈 나의 과거 경험으로 알게 되면서
새로운 관점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의 어린 시절을 살짝 엿본다.
나와 닮은 모습,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그 모습을
아이가 보일 때마다 나는 불안해진다.
나의 닮은 모습,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그 모습을
아이가 보일 때면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아니다.
그리고 불안하고 뿌듯함 또한 '나만의 잣대'임을 기억한다.
이것이 아이들에 대한 나의 욕망이
아예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밝은 성격을 가지고,
사회의 규칙을 준수하며,
유쾌하고 명랑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그를 위해서 공부도 성실히 했으면 좋겠고,
친구들도 잘 사귀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나의 소망, 나의 욕망'임을
절대 잊지 않는다.
'아이를 위해서' 가 아니라,
‘내가 이렇다 생각하고 아이에게 이런 것을 원해서' 라는 점을 항상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와 다른 몸, 다른 머리,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
‘미래의 남'이라는 점을 항상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곁을 떠나 나와의 경계를 짓고
독립된 한 인간으로 나아가려 애쓸 것이다.
그 아이는 훗날, 지금의 나처럼
나와 경계는 짓되, 마음은 연결되는
그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대비하며,
지금도 아이들을 통해 나의 과거를,
우리들의 과거를 되살피며 끊임없이 성장중이다.
그러고 보니,
육아란 아주 멋지고 흥미로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자,
미래의 나를 더 단단하고 멋진 인간으로 빚어내는,
‘나를 위한 맞춤 성장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다.
육아하는 동안 아이와 함께 나도 자랐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나의 과거와 만나 화해하고,
나의 엄마 위치에 서서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진정으로 그녀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에서 자유롭게,
지금 여기에서 나의 존재 위에 두 발로 단단히 서서,
미래의 나를 위해 과거보다 한 뼘 더 성숙한,
자기라는 울타리를 넘어
타인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중이다.
육아는 지독한 자기중심성에서 빠져나오는 훈련을
처절하게 할 수 있는 실전 프로그램이다.
연약한 한 존재를 마주하고, 그 존재를 키워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것의 대가를 요구할 때,
그것은 또다른 '자기애' 이자 '거래' 가 된다.
그들을 대가 없이 놓아줄 때, 그것은 사랑이 된다.
결국 육아는 결국 존재간의 경계를 세우는 훈련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나'라는 존재 밖으로 확장하는 기회다.
아이가 나의 연장선이 아닌 독립된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
부모의 사랑은 자기애에 머물지 않고,
타인에게까지 닿는 넓고 깊은 사랑으로 자라난다.
그런 의미에서, 육아는 부모가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무엇을 주는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또 서로를 통해 성숙해지며,
새로운 사랑을 확장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성장 프로그램,
그것을 나는 '육아' 라 부른다.
“Motherhood is a new identity, a transformation of the self, not just a role.”
— Daniel N. Stern, The Motherhood Constellation (1995)
“모성은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변화, 곧 자아의 전환이다.”
— 다니엘 스턴, 『모성 성좌』
자녀에 대하여
한 여인이 말하였다.
“아이들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그가 대답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삶’의 아들딸이며,
스스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거쳐 왔을 뿐,
당신에게서 온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살 수는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지만,
당신의 생각을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몸을 집에 둘 수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며,
당신이 그 집을 방문할 수조차 없습니다.
당신은 활입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살아 있는 화살로
앞으로 쏘아 보내집니다.
궁수는 무한한 길 위의 목표를 바라보며,
당신을 굽혀 그 화살을 멀리, 빠르게 보내려 합니다.
당신이 굽혀질 때, 그 굽어짐이 기쁨이 되도록 하십시오.
궁수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
굽혀진 활 역시 사랑합니다.”
-칼릴 지브란
#육아에세이
#심리학에세이
#모성애
#심리적독립
#부모성장
#육아철학
#시간여행육아
#아들러심리학
#칼융
#위니콧
#에리히프롬
#마거릿말러
#칼릴지브란
#사랑의기술
#대물림끊기
#자기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