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경계,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
이 말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그리고 심리학자였던 존 듀이가 『민주주의와 교육』(1916)에서 남긴 문장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그 삶의 양식 또한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닮아 있는가?
아니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또 다른 지배의 모습은 아닌가?
아이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강요를 당하고,
배우자는 ‘무조건 내 편’이라는 요구 속에 갇히며,
부모는 ‘효도’라는 명분으로 복종을 요구하고,
시댁은 ‘배려’라는 말로 경계를 침범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이런 모습을 사랑과 가족이라 부른다.
생각해볼 시간이다.
혹시, 사랑의 이름을 빌린 또 다른 폭력의 모습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나는 내 삶에서 많은 순간들을 돌아보며 깨닫게 되었다.
아이와의 대화 속에서, 남편과의 갈등 속에서,
그리고 나의 부모와 시댁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늘 ‘사랑, 관심, 보살핌’이라는 말로
자신의 요구와 욕망을 정당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사회의 부당한 침범과 폭력의 실마리는
사실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인
가정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모른다.
가정과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욕망을 헷갈린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폭력에 가까운 사교육을 시키고,
'명문대'를 향한 부모의 욕망을 주입시킨다.
부부도 서로 진정한 대화나
존재에 대한 다가감 없이,
그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라며, 결국은 희생을 요구한다
자신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분노 뒤의 슬픔과 외로움을 보지 못한 채,
우리는 비난으로 가리고 서로를 욕구 충족의 도구로 삼는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의 선택과 경계를
'가족' 그리고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린다.
이런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나는 독립된 한 사람이 아니라,
가족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부속품으로 취급되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은밀한 침범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 뒤에 교묘히 감추어왔다.
우리도 모르게 은밀하게,
이것이 우리 사회에 폭력과 침범의 씨앗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타인과 나의 경계를 찾는 과정을 지나왔다.
뼈아픈 배움이 내 삶 전체를 관통했다.
‘가깝다’는 이유로 허물어진 경계는
결국 서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내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는 것.
그 습관은 나를 넘어 후대로 이어져
‘대물림’이 되고,
우리의 가정을 넘어 사회 전체로 퍼져가는
‘침범과 폭력의 역사’가 된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을 필요로 했다.
엄마는 나의 순종을,
남편은 나의 이해를,
시어머니는 나의 수용을,
아이는 나의 기대 충족을 원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응답했고,
동시에 나 역시 요구했다.
엄마의 인정, 남편의 사랑,
시어머니의 배려, 아이의 순종을.
'사랑하니까, 가족이니까’라는 말 아래
우리는 서로를 묶어두었지만,
그 말의 뒷면에는 어쩌면
이 문장이 새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내 목적을 위해 이용해도 된다.”
돌아보면,
이것은 내 잘못된 선택이라기보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학습된 습관이었다.
문제는 이 습관이 단지
개인의 방식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 배운 은밀한 지배와 수단화는
곧, 사회 속에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된다.
내가 누군가의 삶을 증명하도록 길들여졌다면,
나 또한 타인을 내 삶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
내가 이러한 사랑이
'원래 그렇다'라고 허용하게 되면,
결국 나 또한 타인에게 이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반에서
경험으로 배운 것을 반복하는 성향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의 힘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서로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그 거대한 개념 뒤에
숨은 민낯이다.
나는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투표나 정치 제도의 문제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니,
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무너지는 자리는
거창한 광장이 아니라
내 안방과 식탁 위였다.
내가 만든 음식을 억지로 먹이려는
아이와의 실랑이 속에서,
내 마음에 쏙 들지 않는 설거지를 두고
남편을 비난하던 대화 속에서,
심지어 부모와 나누던
일상적인 말 한마디 속에서도—
나는 ‘너와 나는 다르다’를
인정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나와 다른 의견을 견디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따라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 반복될 때,
나 대신 남편이, 내 아이가
내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서 움직여주길 바랄 때,
나는 이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태도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국가가 주는 제도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연습하는 문화라는 것을.
가족 안에서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회에서 타인의 독립성을 존중하기란 불가능하다.
가족 안에서 나의 경계를 지켜내는 연습을 해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경계 또한 존중하고 지켜줄 수 있다.
결국 민주주의는 제도 이전에
습관이고, 태도이며,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다.
가정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작은 존중과 인정이야말로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뿌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긴 시간에 걸쳐 민주주의를 이뤄내어 왔다.
헌법이 보장되고, 선거가 치러지며,
법에 어긋난 자는 대통령이라도 탄핵할 수 있는
멋진 제도가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제도라는 하드웨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태도,
서로를 대하는 습관,
일상의 문화라는 소프트웨어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여전히 불안한 하드웨어에 불과할 수 있다.
사회가 이렇게 발전한 만큼,
이제는 우리 각자의 삶의 태도와
가장 은밀한 사적인 영역까지
돌아볼 때가 아닐까.
특히 가정이라는 가까운 관계 안에서,
‘너와 나는 다른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작은 습관이
민주주의의 뿌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쉽게 경계를 허문다.
가까움과 친밀함을 같은 뜻이라 여기고,
허용과 이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나를 구분하지 못해
아이의 문제를 부모인 내가 대신 해결하고,
부모 말이니 무조건 들어야 한다며
사춘기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아이니까”라는 착각 속에서
아이의 선택과 감정을 억누른다.
배우자는 언제나 내 편이어야 한다는 요구 속에서,
그의 처지를 이해할 기회를 빼앗는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시댁의 은밀한 침범조차
‘원래 그런 것’이라며 허락해버린다.
이렇듯 많은 침범들은
결국 사랑과 친밀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은밀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경계를 세우되,
그 안에서 친밀함을 되찾아
진정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이 이해하되,
무분별한 허용은 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첫걸음은 거창한 제도나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삶의 태도들이 모여,
결국은 사회 전체의 모습을 더 건강하게 바꾸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 진정한 사랑을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라 믿지 않는다.
사랑은 내가 하는 선택이며,
그 선택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는다.
나는 부모의 간섭조차 사랑이라 믿었고,
그 억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며
오래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또 나 자신의 억눌림을
사랑이라 믿으며 버텼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말 속에 숨겨진 모순을 보게 되었다.
진짜 사랑이라면 왜 숨이 막히고,
왜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내가 받았던 것은
사랑의 얼굴을 한 구속과 침범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로
그것을 합리화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의 많은 관계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부모의 희생은 ‘헌신’으로,
자녀의 복종은 ‘효도’로,
배우자의 통제는 ‘사랑’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타인의 독립성을 존중하지 않는
오래된 습관이 자리한다.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은
가장 강력한 정당화의 언어가 되어,
은밀히 이루어지는 폭력마저도 은폐해왔다.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그것이 사랑이었는가,
아니면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이었는가.
이제는 다르게 말하고 싶다.
사랑은 지배나 소유가 아니라,
서로의 독립성을 지켜주면서
연결되는 힘이라고.
아이가 나와 다른 선택을 해도 존중하는 것,
배우자가 내 기대와는 다른 길을 걸어도 지지하는 것,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쓸모’가 아닌
한 사람으로 마주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새롭게 배운 사랑의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발견한,
민주주의의 가장 사적인 얼굴이다.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부터
‘다름을 인정하는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민주주의를
삶의 언어로 체득한다.
사랑을 다시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을
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가정에서 시작된 작은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 전체로 더 뿌리깊게 건강하게 번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깊이 이해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그의 눈은 촉촉해진다. 그것은 마치 ‘드디어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알아주는구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에게 이것은 타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이며,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 Carl R. Rogers, On Becoming a Person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