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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넌, 누구야?

보통날, 심장을 베인 말 한마디

by 파랑새의숲

정말, 보통 때와 다르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신랑과 대화 중에, 날카롭게 베인 말 한마디가 있었다.


별것 아닌 말이었는데,

내겐 그것이 유난히 칼끝처럼 파고들었다.
심장이 다친 듯 아팠다. 그래서 아프다고 소리를 냈다.
물론, 참 미숙하게.


사람은 많이 아플수록 미숙하게, 과장되게 반응하지 않던가.


발단은 아주 사소했다.

주말, 마당 한편에서 바비큐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함께 러닝을 시작한 우리는

전문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몸을 쓰는 원리, 코어를 잡는 법, 요가와 비슷한 점들.


나는 요가 강사로서 그 말이 반가웠다.


“맞아, 몸을 가볍게 띄우는 감각, 나 뭔지 알 것 같아.
그 코어 잡는 거, 그건 요가에서도 진짜 중요한데…”


내가 설명하려는 순간, 그의 말과 표정이 날 끊었다.


“지금 러닝은, 당신이 뭘 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고.”


그 말이 내 가슴을 깊게 베었다.
단순한 대화였는데, 나는 이상하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같은 몸을 쓰는 분야라, 내가 아는 것을 내놓고 싶었던 것뿐인데. 뭔가 크게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불편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다 손을 데었다.

신랑이 건네준 접시가 너무 뜨거웠는데,
“앗 뜨거워!” 소리를 내는 나를 그는 잠시 바라만 봤다.


그러다 ‘아차, 화로 옆에 있었으니 뜨거웠겠구나.’를 문득 깨달았는지, 그제야 급하게 접시를 거두고 내 손가락을 괜찮냐며 걱정스레 살폈다.


난 멍하게 그의 그 반응을 지켜보며 서글픔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그의 반응은 늘 그랬다.
내 “아프다”는 말에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원인을 먼저 확인하고 납득할 수 있어야만,

그제야 내 고통을 인정했다.


그날도 어김없었다.

내 하나뿐인 나의 편인, 그가 말이다.

나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서글픔이 폭발했다.


그 순간, 내 안 깊은 곳에서 눌러왔던 서러움이
걷잡을 수 없게 크게 올라왔다.


나는 늘 느꼈다.
내가 하는 일은 남편에게 가볍게 여겨진다고.

요가도, 심리학 공부도.
내겐 소중하고 너무나도 진지한 길인데,
그의 눈에는 보잘것없고 피곤한 얘기로만 비쳤다.


내가 굉장히 보잘것없는 인간이 된 것만 같은,
하찮은 존재감이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부터 묵혀둔 기억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끌려 나왔다.


상처받은 낮은 자존감이 과잉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내가 어떤 좋은 학교를 나왔고, 어떤 대기업에서 일했고,
나 혼자여도 충분히 좋은 직장 다니며 살아낼 수 있었는데…

사랑 하나 믿고 결혼을 택한 나의 선택을 원망하며


그런데 지금, 나는 무엇이 되었는가.

그 결혼이라는 선택을 저주했다.


매사 무시받는 느낌.
공유되지 않는 관심사.
내가 좋아하는 일에 함께해주지 않는 거리감.


그사이 나는 그의 가족과 얽히고설켜
비둘기처럼 소식만 전하는 메신저가 되었고,
내 삶은 없어도 되는 듯 취급되었다.


있어도 무시당하고, 없어도 무관한 사람.
그저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여자.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왔는가.

진정 사랑 때문이었나?
이게 지금 사랑인가?
결혼이라는 사회적 틀 때문이었나?
아니면 혼자서는 버틸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나?


아니, 아니었다.

나는 ‘친밀감’을 믿고 싶었다.

나를 지켜줄 단 한 사람의 가족.
그를 믿고, 그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가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초대받지 못한 채,
그의 세계 주변을 맴도는 존재였다.


한 번 터진 서러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댁과의 끝없는 소통, 그들의 기대.
그 속에서 남편의 대리인처럼 살아야 했던 나.

나는 결심했다.


“이제, 안 할래.”


시댁 전화를 차단했고,
명절에는 신랑과 아이들만 내려가라고 했다.


그리고 집 마당 공사를 시작했다.

내가 오래 바라던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40년 넘는 인생 동안 가져본 적 없던, 나의 자리.


마지막 보루였던 연금을 깨서
마당 바닥을 다지고, 집 담장을 세우고,
마음에 들지 않던 나무를 뽑고,
내 마음에 드는 나무들을 새로 심었다.


신기하게 바깥에서 벌어진 공사와 함께,
내 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단단히 바닥을 다지고,

경계를 세우고,
'나’라는 존재를 다시 세우는 작업.


서러운 날의 시작은
결국 내 안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계기였다.


그 상처가 터져 나오던 날, 나는 내게 물었다.


“넌, 누구야?
지금,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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