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장밥 Sep 21. 2023

로또를 사야 로또가 되지

八. 雖覆一簣, 進, 吾往也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은 대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젊음과 시간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은 널려있고, 책임져야 할 부양가족은 없는 상황. 몸뚱아리 하나 믿고 이리 저리 치고 받아도 용서받을 수 있는 시기. 시행착오를 해도, 다음 시도를 또 할 수 있는 나이. 그게 대학생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 시절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건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할 그 어떤 직업보다 대학생이라는 지금의 직업이 더 좋을 거라고, 이거보다 더 나은 직업을 택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이 생각에 변함이 없는 건 다소 불행스러운 일이지만 말이다.


비록 돈은 없었으나 시간은 있었다. 시간 한 뭉텅이는 돈을 버는 데 썼고, 다른 한 뭉텅이의 시간에는 돈 없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쉼 없이 찾아다녔다. 이른바 대외활동이 그것이었다.


좋은 기회들이었다. 약간의 품만 팔면 용돈 벌이도 할 수 있었고, 외국에 갈 수도 있었다. 비행기삯이 부담스러워 대학생활 내내 외국 한 번을 못 갔었던 내게는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커다란 상품이었다.


그러던 중, 또 하나의 매력적인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핵심은 독도였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를 가면 있다는 그 독도 맞다. 이 프로그램에 선발되면 독도에 보내준다는 거였다. 외국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끌리는 활동이었다.


해야할 건 별 거 없었다. 일정 시간 이상의 역사 교육을 받고, 독도 지킴 활동을 해서 수료를 하면, 대원들이 다 같이 독도에 간다는 거였다. 일부만 선별해서 보내주는 게 아니니까 일단 뽑히기만 하면 경쟁에 대한 부담도 없었고, 원체 역사를 재밌어하던 터라 역사 교육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꿀이었다.


지체 없이 지원을 했고, 뽑혔고, 활동을 했고, 수료를 했다. 독도로 향하는 배편에도 올랐다.


그러나 끝내,

내가 독도에 가는 일은 없었다.



승선을 했다. 우선은 울릉도로 향하는 배라고 했다. 독도로 바로 가는 편은 없어서, 울릉도에 들렀다가 독도를 간다고 했다.


배가 낯선 사람들은 꼭 멀미약을 먹으라고 했다. 쪽배처럼 작은 배는 아니지만, 파도에 울렁이는 배 움직임 때문에 열에 여덟은 속을 게워낸다고 했다. 그렇구나, 그러면 먹어야지. 마시는 약도 먹고, 귀 밑에 패치도 붙였다.


멀미약에는 수면 유도 기능이 있어서 좀 졸릴 거라고 했다. 배가 출발하면 한숨 자라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있을 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함께 약을 먹은 다른 대원들도 비슷했다. 잠과 굳이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우리는 잠이 들었다. 가끔 배가 크게 너울칠 때는 잠에서 설피 깨기도 했지만, 약기운 덕인지 금방 다시 잠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배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항구에 정박한 것이다. 이제 내리면 된다. 울릉도인지 독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들 내리고 있었다.


신기한 건, 배에 오를 때와 풍경이 정말 똑같았다는 거다. 도시에서 나고, 도시에서 자란지라 선착장을 잘 구별하지 못 한 탓이었을까.


아니, 그런데 똑같아도 너무 똑같았다. 이정도로 똑같을 수가 있나.


의문은 금방 풀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똑같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구별을 하지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 내린 곳은, 아까 전에 배가 출발했던 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배가 출발은 했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울릉도 가는 길에 회항을 했다는 것을. 원래 독도에 입항할 수 있는 날은 1년에 백 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뒤로 독도에 입항할 기회를 다시 받지는 못 했다. 아쉽지만 이해는 됐다. 비록 회항은 했을지언정, 배삯은 고스란히 다 지출되었을 테니. 우리에게 또 쓸만한 경비는 남아있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이 활동은 실패한 활동이었나. 독도 때문에 지원했는데 정작 독도는커녕 울릉도조차 밟아보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실패한 활동이었나.


그렇지 않았다. 최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엉뚱한 곳에서 의외의 결실이 맺혔다.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같이 활동을 하던 대원이었고, 울릉도도 못 미쳐서 회항을 했던 배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었다. 독도는 가지 못 했지만 우리의 인연은 계속되었고, 몇 차례의 만남 끝에 마침내 연애에까지 이르렀다.


지금은 헤어져 각자의 가정을 갖게 되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우리는 가장 오랜 기간 만난 연인으로 남았다.



꼬맹이들은 그냥 걷는 법이 없다. 걸어가면 되는데, 한사코 그렇게 뛴다. 뛰지 말라고 해도 뛴다.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다.


노인네들도 그냥 걷는 법이 없다. 짧은 길이라도 중간에 쉬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힘들어서 갈 수가 없다. 기력이 다한 것이다.


그 중간쯤에 서있는 나는 딱 그 중간쯤이다. 과거에는 활기가 가득 차있었을진대, 어느새 시들시들해져있다. 바람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아직 중간에 쉬어갈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동력이 예전 같지 않다.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특히 그렇다. 대학생 때만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이것 저것 다 욕심부리고 다녔는데, 이제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에는 많은 결심이 필요하다. 스스로에게 수십 차례 채찍을 내리쳐야 간신히 꼬물거리는 수준이다. 추진력이 동났다.


그와 반비례하여, 바라는 건 많아졌다.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맞았으면 좋겠다. 그 소망이 점점 간절해지고 있다. 사람이 이러다가 도박에 빠지는구나 싶을 정도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나는 복권에 당첨될 수도 없구나, 복권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복권 당첨은 어마어마한 행운이지만, 그 행운조차 복권을 산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복권을 사지조차 않으면, 그 희박한 행운마저도 꿈꿀 수 없다. 얻어 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독도를 가고 싶어서 지원했던 대외활동에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 것처럼, 의도치 않았던 행운도 어쨌든 무언가라도 한 사람한테만 얻어 걸린다.


어느덧 나는 복권조차 사지 않고 있다. 무언가를 하는 데에 지쳐버린 까닭이다. 그러면 당첨을 바라지 않아야 하는데, 그건 또 전보다 더 바란다. 가정을 꾸렸다는 핑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나이키에서 쓰이던 슬로건이 생각난다. 일단 하면, 그냥 한번 해보면, 그러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거다. 그것만으로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될 거다.


다시 한번 스스로를 일으켜본다. Just Do It.


우리, 힘내자.


일단 해봐!
로또를 사야 로또가 되지


雖覆一簣, 進, 吾往也 <子罕>

(수복일궤, 진, 오왕야 <자한>)

이전 07화 자식은 부모의 거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