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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Oct 05. 2023

떳떳하게 살자

十二. 獲罪於天, 無所禱也.

할머니는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셨다. 손님에게 그렇게 친절한 장사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럴 법하다. 그때는 모두가 억척스럽게 장사를 할 때니까. 할머니의 마음가짐은 그 두꺼운 팔뚝만큼이나 드세었을 거다.


얼음과 생선이 깔린 좌판 뒤에는 나무 밑동을 그대로 잘라온 것 같은 커다란 원통형 도마가 있었고, 다시 그 뒤에는 뜨끈한 아랫목이 있었다. 끽해야 세 명 정도가 간신히 앉을만한 너비. 깔려있던 누런 비닐장판은 진즉 시꺼멓게 눌러붙었다. 한 켠에는 어른 손으로 한 뼘이 좀 넘을 법한 TV가 높게 얹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체크무늬 천으로 가려진 비밀 공간이 있었다.


비밀 공간. 할머니는 거기에 늘 잔돈을 두셨다.


아직 시장에서는 카드를 쓰지 않던 때. 상인들에게 거스름돈 구비는 필수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곳에 잔돈을 보관하신 거다. 뻘건 플라스틱 채반에 동전을 담아두고는 천으로 가려진 TV 아래 공간에 채반째 두셨다.


어린 내겐 적지 않은 유혹이었다. 100원이면 오락실을 가고, 200원이면 아이스크림을 먹던 시절. 묵직하게 쌓여있는 동전 더미는 꽤나 매혹적인 선악과였다.


맹세컨대 할머니의 잔돈 채반에 손을 댄 적은 없다.


그 날, 딱 한번을 제외하고.



어머니는 생선가게 며느리셨다. 그냥 며느리도 아니다. 무려 6남 1녀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 생선가게에서 시어머니를 돕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할머니 가게에 상시 매여계셨던 건 아니다. 어머니도 어머니 생활이 있으니, 그게 우선이 되는 게 맞지. 다만 어머니는 꽤나 자주 할머니 가게에 가셨다. 때로는 내 손을 잡고 함께 가기도 하셨고, 때로는 내가 할머니 가게에 앉아 놀고 있으면 오시곤 했다. 시장에서 효부로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꽤 고생을 하셨을 것 같다.


그 날은 어머니 없이 나 혼자 할머니 가게에 가있었다. 날이 추운 겨울이라 할머니와 나란히 아랫목에 뜨뜻하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생선을 사러 손님이 오자 같이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응대를 하러 일어나셨다. 손님맞이를 나까지 할 건 아니니까, 나는 계속 장판에 앉아 TV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 날따라 이상하리만치 자꾸 비밀공간에 눈이 갔다. 갑자기 그랬다. 딱히 먹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돈을 쓸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 거라면 할머니께 말씀드렸으면 그만이었을 거다. 할머니가 몇 푼 돈을 내게 안 주셨을리 없으니까. 그냥 돈 자체가 욕심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할머니 눈치를 계속 봤다. 할머니가 뭐하시나, 뭐하시나. 다행인건지, 할머니는 계속 손님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이 때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비밀공간을 가리고 있었던 천 사이로 재빨리 손을 넣었다. 막바로 플라스틱 채반에 손이 닿았고, 큼지막한 동전을 재빨리 꺼냈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 생선을 비추던 전구에 비춰 번쩍번쩍 빛이 났다. 나는 얼른 호주머니에 동전을 쑤셔넣었다. 할머니에게 들킬까봐 그랬는지, 또는 양심에 찔려 부끄러운 마음에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졌던 것만 기억난다.


동전을 훔치고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직 해가 떠 있는 오후, 가게 문을 닫기엔 이른 시간. 할머니 가게로 어머니가 오셨다. 나는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신 아들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채지 못 하신 채, 어머니는 집에 가자며 일상적으로 내게 손을 내미셨다. 바지 주머니 속에 든 동전과 함께,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가게를 나섰다.



천으로 된 바지 속에 동전 한 닢. 서로 맞부딪힐 다른 동전이 없었기에 짤랑거릴리가 없었지만, 나는 적이 마음이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들킬 것 같아서 조마조마 마음을 졸였다. 그래서였을 거다.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동전을 꽉 쥔 채 길을 걸었던 건.


어린 마음에 참 많이도 갈등했다. 이걸 어떡하지. 일단 동전을 몰래 가져오긴 했는데. 할머니도 모르고 엄마도 모르는데. 근데 내가 갑자기 돈이 생기면 엄마가 이상하게 생각 안 하실까. 어쩌지. 그냥 말할까. 지금이라도 말할까.


장고 끝에 나는 얕은 꾀를 냈다. 이 돈을 땅에서 주운 척 하는 거다. 이 돈이 주운 돈이 되면, 갑자기 어디서 돈이 났냐며 의심을 안 사도 되고, 할머니 돈을 몰래 갖고 나왔다는 건 영영 비밀이 될 거다. 완전범죄. 그래, 이거다.


머릿 속으로 몇 번을 시뮬레이션 했다. 권투로 치자면 쉐도우 복싱. 자, 엄마를 몇 걸음 먼저 보내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손에 쥔 채로 땅에서 줍는 듯한 시늉을 하고, 놀란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면 엄마가 뒤돌아보고, 그 때 엄마한테 와 엄마! 나 돈 주웠어요!라고 말하고. 이미지 트레이닝도 완벽하게 했다. 꼬맹이가 생각한 계획치고는 나름 영악하고 그럴듯한 플랜이었다.



현실은 달랐다.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다. 내 마음도 모르고, 어머니는 당최 나를 뒤에 두고 앞서서 걷지 않으셨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키도 어른의 절반정도 밖에 안 되는 꼬맹이를 굳이 시야 밖에 둘 이유가 어디 있겠나.


당황했지만, 완벽한 내 플랜을 위해서 나는 뒤쳐져서 걸어야했다. 그게 완전범죄를 위한 첫 번째 스텝이었다. 그래서 나는 쭈뼛거리며 속도를 늦췄다. 너무 대놓고 늦춘 탓에 왜 그러냐는 어머니의 채근을 듣기도 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충분한 거리는 아니었으되, 어쨌든 한 두 걸음 정도 어머니로부터 떨어지게 됐다.


그 뒤로는 순서대로 잘 진행했다. 아까부터 손에 꽉 쥐고 있었던 동전을 주머니 밖으로 꺼냈고, 엉거주춤 땅에서 뭔가 줍는 척을 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불렀고,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돈을 주웠다고 말이다.


어, 그런데 뭔가 또 달랐다. 첫번째 스텝이 엉켰던 것보다 더 싸했다. 어머니가 이상했다. 내가 예상했던 어머니의 반응이 아니었다. 돈을 줍는 건 기분 좋은 일일 텐데, 그렇다면 아들이 돈을 주웠다고 소리치면 같이 기뻐하면서 그 돈은 너 가지라고 얘기를 해주셔야 할 텐데, 어머니는 그러지 않으셨다. 잠자코 나를 바라보며 서계셨다.


짧은 침묵을 깨고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주웠다는 그 돈, 가져와보라고. 어머니는 내게 손을 내미셨고, 나는 다가가서 어머니의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았다.


그 때였다. 어머니가 내게 매섭게 말씀하신 건.


"너 이 돈 어디서 났어."


이게 무슨 조화지. 이 흔해 빠진 500원짜리 동전을 보자마자 어떻게 땅에서 안 주웠다는 걸 아신 거지.


"솔직히 말해. 어디서 났어."


어머니의 다그침에, 그리고 당황스러운 예상 밖 상황에 나는 눈물이 터졌다. 엉엉 울면서 사실을 말했다. 할머니 몰래 할머니 가게에서 가져왔노라고. 말을 하면서도 눈물은 그치질 않았고, 말을 다 하고 나서도 한동안 울음이 계속 되었다.


가쁜 호흡이 멎어들자 어머니는 내게 동전을 되돌려주셨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타이르셨다. 할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죄송하다고 사과드리라고. 용서를 구하라고.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간 할머니 가게. 울음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보고 할머니는 웃으셨다. 나는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말하고 사과를 드렸지만, 할머니는 연신 웃으며 괜찮다고만 하셨다.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면서 오히려 동전을 몇 개 더 주실 뿐이었다.



할머니 몰래 할머니 돈에 손을 댔다는 죄책감과 얄팍한 꾀를 부리다가 보기 좋게 들켜버렸다는 수치스러움은 뼈 속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할머니 물건에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강약을 슬기롭게 섞으신 어머니의 가르침과 도둑질한 손자마저 품은 할머니의 따뜻함이 아마 큰 역할을 했을 거다.


안타까운 건 아들내미의 잔욕심이 눈 녹듯 곧바로 사그라들지는 않았다는 거다. 할머니 껀 건드리지 않았을지언정, 그 뒤로도 작디 작은 서리는 계속 이어졌다. 초등학교 땐 교문 앞 문방구에서 펜을 슬쩍하기도 했고, 중고등학교 땐 불법 사이트에서 만화책이니 영화니 하는 것들을 잔뜩 다운받아 보기도 했다. 겁이 많아서 대도는 못 되고, 쫌생이마냥 쪼잔한 거에 목숨 걸고 욕심을 부려댔다.


긴 세월이 지나고, 어머니와 할머니가 뿌려놓으신 가르침은 마침내 빛을 발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그 때의 가르침을 뒤늦게 깨달은 거다. 작은 욕심을 부리는 게 결코 이득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회계적으로는 약간의 이익을 보는 듯 해도, 이 놈의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아무도 몰라도, 오직 나와 하늘만 아는데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 불편함과 신경쓰임은 내 작은 이익에 대한 대가였다.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작은 이익은 결코 이익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여도 마찬가지일 거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지만, 양심을 팔고 하늘에 죄를 지으면서까지 내 욕심을 부린다면 결코 정승같이 쓰지 못할 거다. 완벽하게 비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또는 남들에게 끼친 피해를 완전히 눈 감을 수 있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정당하지 못한 욕심은 결국 내 손해로 귀결된다.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해 불편한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큰 데미지다.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이들은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길 바란다. 다만 우리가 자꾸 잊어먹는 건, 돈도 결국 행복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거다.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벌면, 우리는 마음 속에 그만큼 큰 응어리를 맺는다. 억만금을 벌어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니, 어쩌면 많이 벌면 벌수록 죄책감은 더 쌓일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의 우리는, 돈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고, 우리의 인생에서는 우리가 곧 하늘이다. 그래서 하늘에 지은 죄는 빌 곳이 없다고 하는 거다. 누군가에게 지은 죄는 그 사람에게 용서를 빌면 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지은 죄는 용서를 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떳떳하자. 당당하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자. 그게 가장 이기적인 태도다. 가장 스스로를 위하는 일이다. 그 어떤 경우보다, 그 편이 제일 개이득이다.



"엄마"

"응?"

"근데 그 때, 내가 그 돈을 몰래 가져와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돈을 주웠다고 얘기하기 전부터 얘가 계속 쭈뼛쭈뼛거리길래 뭔가 있구나 싶었지."

"그것만으로 알았다고요?"

"아니? 진짜 결정적인 증거가 있었어."

"뭔데요?"

"동전이 따뜻하더라. 니가 엄마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는데, 그게 따뜻하더라. 몰랐지?"

"동전이 따뜻한 게 왜요?"

"얘 좀 봐. 생각을 해봐라. 그 추운날에 동전이 땅바닥에 떨어져있었으면 따뜻한 게 말이 되니? 니가 손으로 한참을 꼭 쥐고 있으니까 체온에 데워진거지."

"와, 그러네. 엄마 귀신이다 진짜."

"너는 엄마 손바닥 안이야. 엄마 속일 생각은 하지도 말어. 너 스스로도 속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떳떳하게 살어."

"아우 엄마! 또 잔소리!"


떳떳하게 살자

獲罪於天, 無所禱也. <天命>

(획죄어천 무소도야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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