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설득 (1)
2015년 겨울, 생일.
많은 집에서 그러하듯이, 우리집도 가족 생일에는 으레 외식을 하곤 했다. 그 날의 생일상은 일식집에서의 초밥과 사시미. 아빠는 날 것을 안 드시지만, 그 피를 반이나 물려받은 나는 없어서 못 먹는 메뉴다. 평소에 쉽게 가지 못 하는 곳이기에 주인공에 맞추어 특별히 골라졌다.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인 선택이었지만, 뭐, 생일상을 생일러에게 맞추는 건 국룰이지. 그러나 내 이기심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날, 나는 또 하나의 이기적인 선택을 천명한다.
두팔 : 저, 결혼식 안 합니다.
딱히 유리한 날을 고른 건 아니었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꽤 좋았던 분위기에서였다.
엄마 : 응? 결혼을 안 한다고?
아빠 : 혼자 살려고?
맥락 없이 툭 튀어나온 선언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물음표로 뒤덮였다.
두팔 : 아니요, 결혼은 할 건데, 결혼식은 안 할 거에요.
일반적이지는 않은 얘기. 가족들의 차례로 반응했다.
엄마 : 그래 그래. 늬 여자친구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해라.
약간의 농담기가 섞인 말. 어디 한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두고 봐라, 하는 느낌이었다. 세상 어디에 결혼식 없이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있겠느냐, 하는. 사실 나 역시 내심 늘 걱정하던 부분이었던지라 썩 날카롭게 들렸다.
아빠 : 아빠도 유난 떠는 거 싫어하잖냐. 결혼식, 어우 그거 번거롭게.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좋지. 아빤 언제나 두팔이 편이야.
조용한 걸 좋아하는 아빠는, 조금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결혼식 같은 왁자지껄한 이벤트를 싫어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빠도 아래에 이어질 엄마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7년 뒤, 막상 결혼식 없는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자, 이 때와는 꽤나 다른 반응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때는 아빠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백미는 할머니였다.
할머니 : 아이고, 아이고. 이게 다 뭔 소리다냐. 도둑결혼을 한다는 거시냐.
할머니는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내시더니, 말을 급하게 쏟아내셨다. 마치 당신의 손자 입에서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은 조금도 생각지 못하셨던 듯이.
도둑결혼. 결혼식 없이 하는 결혼을 이렇게 부르는구나. 보쌈해온다는 걸로 들리는 걸까.
이 때 처음 안 말이었다. 느낌은 대강 와닿았으나, 나중에 뜻을 정확히 찾아보니 남몰래 하는 결혼을 일컫는 말이란다.
할머니 : 니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걸 하냐. 인물 좋지, 날씬허지, 이제 직장만 번듯하게 잡으면 시집 오겠다는 여자애들이 천지 사방으로 줄을 설 터인데.
고슴도치. 인물도 좋지 않고, 그다지 날씬하지도 않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보다. 사족이지만, 그런 할머니도 요즘은 내게 니 살 빼야겄다 하신다. 그 때보다 15kg은 족히 더 찐 살이 고슴도치의 콩깍지도 뚫어낸 것 같다.
두팔 : 아유, 할머니, 도둑결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결혼식만 안 한다는 거에요.
웃으며 할머니를 달래보지만.
할머니 : 시상에. 결혼식도 안 하고 워떡하냐. 그냥 같이 산다는 거냐. 어메. 결혼식은 해야지.
두팔 : 에이, 뭐 굳이 그런 걸 해요.
안심 아닌 안심. 그저 내 입장만 반복하는 꼴이었다.
아빠 : 다음 주에 당장 결혼한다는 건 아니잖아?
두팔 : 그쵸?
엄마 : 그래, 그 때 가서 결혼할 사람이 결혼식하자고 할 수도 있는 거고. 그치?
두팔 : 네, 뭐, 그렇긴한데, 네, 뭐, 그렇죠.
아빠 : 그래 그래, 두팔이 결혼식이니까, 두팔이랑 여자친구랑 하고 싶은대로 하고
그러고보니 동생은 초밥만 먹었다. 우리 얘기가 안 들렸나.
동생 : (우물우물)
입을 초밥 먹는 데 쓰느라, 말하는 데 쓸 입이 없었나보다.
두팔 : 하여튼 전 분명히 얘기 했어요~
분명하게, 아주 명확하게 가족들에게 얘기했기에, 이미 한참 오래 전에 선언했고, 그 때만해도 그래라 하는 분위기였기에, 게다가 그 뒤로도 몇 번은 더 일관되게 얘기해왔었기에,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설득이나 갈등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막상 결혼식 없는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자, 자식놈 마음을 돌리기 위해 때로는 돌려서, 때로는 대놓고 결혼식 얘기를 계속 하셨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도 적잖게 쌓이게 되었다. 그 과정이 꽤 빡셌다.
아빠 : 그 왜 훈철이 있잖아
엄마 : 네, 훈철씨. 왜요?
아빠 : 내가 두팔이 결혼을 얘기하면서, 두팔이가 어르신이 있는 집이라 코로나가 걱정된댄다, 그래서 가족들끼리만 조용히 작은 결혼을 하기로 했다, 뭐 그렇게 변명하면서 좋게 좋게 얘기했는데도 그래도 꼭 오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셋이서 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뻔히 나를 앞에 두고 두 분이 얘기를 하신다. 짐짓.
아빠 : 그래서 내가, 아니 두팔이가 가족만 하잔다, 했더니 아니 자긴 가족 아니냐고, 정 그러면 본인이 호적을 파서 옮기겠다잖아.
엄마 : ㅎㅎ 훈철씨가?
아빠 : 응, 그래서 내가, 두팔이가 본인 기준 2촌 이내만 하잔다 한다 했더니, 아니 그런 게 어딨냐, 그럼 화환이라도 보내게 주소라도 알려달라 하더라고.
아빠에겐 유독 사이가 돈독한 친구분들이 몇 계신다. 부러울 정도로 친하다. 그렇기에 친구를 꼭 부르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빠 친구가 올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내가 결혼식을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웩 더 독. 그건 주객이 뒤바뀌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노웨딩에 대한 생각은 몇 년 전부터 계속 이야기해 온 바고.
엄마 : 주소 알려주면 또 불쑥 찾아오면 어떡해
아빠 :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화환 같은 것도 일체 안 한다, 쓸 데 없는 허례허식은 최대한 줄이기로 했다, 고 했지.
엄마 : 훈철씨가 아쉬워하는구나
아빠 : 응, 계속 섭섭해하더라고.
이 날 뿐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가 심심찮게 많았다. 엄마 아빠가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결혼식을 하기로 마음을 바꾸진 않을 텐데 말이다.
직장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 사느라 한 달에 한두번쯤 얼굴을 봐왔었는데, 거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이거 때문에 얼굴 보기가 꺼려질 정도. 가족 간의 돈독한 사이를 위해서라도, 필요악, 약간의 성질을 내며 다시 또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두팔 : 저 결혼식 안 해요. 아무리 말씀하셔도 이건 바뀌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