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완벽주의자
내 인생의 미루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이렇게나 오래 생각해야 해? 생각의 시간이 길면 늘 흡족한 결과를 얻곤 했는데 오늘은 처참한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다.
선생님이 되어 처음 맡은 담임, 아이들과 1년 내내 함께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었다. 그 첫 번째로 선택한 것은 아침글쓰기. 더도 말고 딱 3분만 써 보자. 눈치보지말고 거리낄 것 없이 3분 동안 펜 끝에 내 마음을 맡기는거다. 사춘기 아이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거라 생각했다. 3분 글쓰기에 쓸 노트는 반드시 내 손으로 골라주고 싶었다. 그것도 이쁜 걸로. 맘에 꼭 맞는 노트를 찾고 싶었다. 줄 없는 노트는 별로야, 이건 너무 작아. 이런 저런 이유로 적당한 노트를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3월 첫 날 시작하려던 프로젝트는 4월이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이라는 의미가 반쯤은 퇴색했다.
교생 시절에 이런 일도 있다. 한 달여의 시간을 함께 한 반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살던 지역이 아닌 곳에서 교생 실습을 한 탓에 그 지역 지리를 잘 몰랐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도 됐으련만 그 때만해도 인터넷쇼핑이 이만큼 활성화되지는 않았을 때다. 지내던 곳 근처에 제법 큰 문구점이 있었지만 왠지 그 문구점은 아이들이 많이 오고가는 곳이라 특별한 선물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오늘은 꼭 이 동네 탐방에 나서야지. 내일은 꼭 선물을 사러 나가야지. 차일피일 미루다 한 달여의 시간이 다 흘러가고 나는 허둥지둥 그 문구점에서 선물을 골랐다. '마음 담은 선물'이고 싶었는데 그냥 '선물'이 되었다.
내가 학생일 시절에는 좀 나았을까? 아니다. 나는 시험기간이 되면 늘 벼락치기를 하느라 3일을 잠을 못잤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다. 평소에 공부를 좀 해두었으면 좋으련만 시험공부는 미루라고 있는 것임을 몸소 선보이다 시험기간이 임박해서야 날밤을 새어가며 공부했다. 몸이 정말 힘들었다. 어쨌든 시험은 잘 치고 싶으니 초인적인 힘으로 잠을 쫓아가며 시험공부를 하고 시험을 쳤지만 시험 마지막날 친구들이 모두 후련한 기분을 만끽할 때 나는 집으로 곧장 와서 그야말로 후련할 정도로 잤다. 종종 엄마가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대어볼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내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대체 '미루기'는 언제부터 나와 함께 내 인생을 살아온거지? 나는 왜 그런거지? 이건 좀 심하잖아!
요즘 나는 매일 3절씩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필사하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얼마 전 만 1년을 꼬박 채운 장기 프로젝트다. 매월 1일에 시작해서 마지막 날까지 한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쓰면 그 달은 필사 성공이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하루에 3절씩이니 부담이 없다. 한 달 필사 성공은 무난해 보였다.
열두 달 하고도 한 달을 더 필사를 해 오는 동안 내가 필사완주에 성공한 달은 과연 몇 달일까? 두 달? 세 달? 모두 아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한 달이다, 한 달! '밤에 커피 한 잔 곁에 두고 은은한 불빛 아래 편안하게 써야지' 하고 밤까지 필사를 미루다 아이들과 잠들어 버려 놓친 날이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