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와 그들이 내세우는, 청구권에 대한 가장 확실한 부정 논리는,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든 그 문제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당 조약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 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 체약국의 관할 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 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 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그들은 이 내용을 근거로, 과거사 문제를 서로 어떻게 인식하건 간에 청구권 협정이 타결되었기에 개인 청구권을 포함한 일체의 대일 청구권 소멸되었으며,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을 선고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청구권 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억울하지만 어찌됐건 국가간 조약으로 끝맺음을 했으니 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청구권은 살아있다
하지만 이 조약으로 인해 소멸된 것은 피해자 개인들의 청구권이 아니라, 민사상 청구권에 대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이다. 한국 정부가 청구권을 행사하는 과정을 주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피해자 개인들의 권리 행사를 끝냈다는 의미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한국 입장만 반영한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말을 바꾸기 전까지 일본 정부 측에서도 인정한 부분이다.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시나 에쓰싸부로 일본 외무대신은 외교 보호권만 포기한 것이라 밝혔으며, 1990년대 초 야나이 순지, 단바 미노루 등 외무성 조약국장들도 자체 예산위원회에서 청구권 소멸은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만 이는 한국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구소련과의 관계 설정 문제 때문이었다. 구소련과 맺은 일소 공동선언에서 양국이 “국가, 단체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라고 밝히자, 구소련에 재산을 두고 온 일본인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일본 국민 각 개인이 소련에 대해 제기하는 청구권 행사까지 막힌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기본조약의 청구권과 소련에 대한 청구권 문제를 서로 다르게 규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자국민들 문제는 그런대로 잠잠해지고 2000년 이후 강제동원 피해자의 소송이 잇따르자 개인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을 바꾸었을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 국제법 정신은 개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진행된 정부의 법적 행위는 개인의 권리에 우선할 수 없다고 본다. 같은 정부가 입장을 번복했다 하더라도 현대의 기준에 맞게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더불어, 조약의 ‘해결된 권리’에는 식민지배에 의한 피해 자체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국정부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 측의 해석도 같은 입장이다. 일본정부에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청구권 협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한국 측의 정부 단위 청구권 행사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불씨이기도 하다.
그들은 개인 청구권을 부정하기 위해, 한일기본조약에 이미 피해자 개인들에 대한 배상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한다. 청구권 협상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한국인 노동자의 손해와 고통이 다루어졌으며, 장면 정부가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발언 내용은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 과정에서 교섭 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하고, 13년에 걸친 교섭 과정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었던 내용도 아니다.”(대법원) 공식 발표되지 않은 내용은 효력이 없으며, 한국 측이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공식 발표에서 배제된 것은 그만큼 피해 보상의제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만 증명할 뿐이다.
법원 판결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편하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론 밀어붙이기 만으로 이 판결이 가능했다면, 일종의 국내 전초전이라 볼 수 있는 매국노 자손들의 재산 환수 소송 역시 그렇게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개인적 단위에서도 환수하지 못한 재산이 많은 것은, 민족적 감정과 별개로 법적 기준에서 증거와 맥락을 모두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세와 실력을 자랑하는 로펌이 일본 기업 측을 변호했음에도 대법원이 위자료 지급을 판결한 것은 그만큼 현재 확보할 수 있는 증거만으로도 소송 원고들이 강제동원 피해자임이 명백하며 청구권 행사가 정당하다는 뜻이다. 청구권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