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연행은 없었다?
그들(반론을 펼치는 글의 성격상 역사부정 세력을 지칭하는 횟수가 매우 많을 것 같아, 이 시리즈에서는 '그들'로 호칭을 통일한다.)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자발적 의지로 성매매에 나선 매춘부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선 '위안소'는 일본군이 통제하기는 했으나, 민간업자의 책임 아래 운영된 공창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일단 공창제라는 제도 하에서는 사기를 동원하거나 폭력적으로 여성을 모집하는 것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안부제' 하에서 실제 동원은 일본군이 직접 움직이거나 일본군 지시를 받은 업자의 취업사기, 강제 모집이 많았다. 일본 육군성은 1938년 3월 4일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통첩을 중국 파견군에 하달했다. 이 문건에는 모집업자 선정 및 통제, '위안부' 모집에 이르는 업무 지시 사항이 담겨 있다. 그들은 위안부 모집과 수송에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업자에게 편의를 제공한 것이지 공권력이 강제로 부녀자를 끌고 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군인, 경찰, 관리가 취업 사기를 직접 주도했다고 증언한 경우가 많다. 일본군이 피해자를 현혹할 때 필요한 전차금(근로 계약 체결 시 사후 임금에서 변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미리 받는 금액) 용도의 현금을 서울의 은행에 송금해 총독부에 관리를 맡겼음을 알려주는 문서도 남아있다. 피해자들이 위안소에서 지내며 저금한 수단은 군사우편저금이며, 이는 위안소가 민간인 업소가 아니라 군이 관리하는 동원 대상임읠 의미한다. 이처럼 '위안부' 모집 및 이송에 일본 정부와 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 감독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피해자들은 명목상 임금을 받고 저금을 하기는 했다. 해당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
그들은 또 부녀자를 사냥하듯 끌고 가는 강제 연행은 없었으며, 연행을 지시하는 공문서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한다. 위안부 모집 시기의 통계를 살펴보면 약취(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범죄)나 유괴 범죄 수치가 낮기 때문에 강제 연행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을 유괴할 때 경찰이 협력하기도 하고 직접 모집에 가담하기도 했기에 애초에 '위안부' 관련 사건은 아예 수사 및 검거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궤변에 불과하다. 강제연행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문건을 찾기 쉽지 않다고 하나,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불리한 내용들은 파기된 잔존 공문서에만 근거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공문서가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나치의 대학살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피해자들은 가족에 의해 팔렸을 뿐이다?
그들은 피해자들의 명확한 증언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는지, 피해자 본인의 동의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 또는 다른 가족들의 동의는 얻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간 주선업자가 여성을 모집할 때 보호자의 취업 승낙서가 필요한데, 모집책들이 가난한 호주(일제가 도입한 호적법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들에게 가족을 대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던 지위로,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아 2008년 폐지되었다)들을 꼬드겨 딸이나 동생을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 아버지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직접 동원자인 일본 정부의 책임은 도의적 수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려는 꼼수이다.
호주가 딸을 팔아넘긴 사례는 '위안부'를 모집하기 이전 시기의 인신매매(창기, 예기 등)에 관련된 것이다. '위안부' 모집 시 아버지가 딸을 팔아넘긴 사례는, 정대협에 증언한 피해자 43명 중 1명에 불과하며 그나마 부친이 '위안부' 모집인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인신매매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밖의 42명은 취업사기(32명), 헌병대의 강제 연행(10명)으로 인해 동원되었음을 밝혔다. 1993년 보건복지부에 생활 지원금 신청을 위해 피해 사실을 밝힌 175명의 신고 내용에서도 인신매매로 위안소로 끌려간 경우는 4건에 불과하며, 대부분 취업사기나 폭력으로 딸을 빼앗기며 절규하는 부모의 모습을 증언했다.(취업 사기82명, 군인과 경찰의 협박과 폭력으로 인한 연행 62명, 유괴 및 납치 5명, 기타 22명)
그들은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시간이 갈수록 달라진다며 무시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부정확한 꼬투리 하나를 잡아 범죄 사실을 부정하려는 범죄자들의 논리와 그 수준이 동일하지만, 정대협은 증언을 받을 때 이러한 부분 역시 고려했다. 증언자의 의도적인 사실 왜곡을 막기 위해 밀착 조사를 진행하고 논리가 맞지 않는 부분은 채택하지 않았으며 면접은 5~6차례 진행하고 기록자료를 활용한 확인을 거쳤다. 최소한의 확인이 어려운 경우 아예 조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 내용은 그들 중 한명인 안병직이 변절 이전 증언 조사에 참여했을 때 말한 것이다.
그들은 피해자 중 한명인 문옥주의 증언도 왜곡하여 활용하였다. 문옥주의 증언에 대한 취사 편집 및 왜곡 사례는 앞으로도 언급이 될 것이다. 그들은 문옥주의 집이 매우 가난했으며 어머니나 오빠의 허락 하에 헌병대가 끌고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옥주의 증언에서 가족이 자신이 동원되는 것을 허락했다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문옥주에 따르면, 1년 만에 돌아온 그를 보고 어머니는 기뻐하며 딸의 갑작스러운 실종에 놀라 병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으며, 오빠와 남동생은 그가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 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위안부' 동원 과정에 대한 사실적 언급은, 길을 걷던 중 일본인 헌병에게 붙잡혀 기차에 태워졌다는 것 뿐이다.
강제연행을 짐작할 수 있는 상황들
그밖의 정황들도 강제 동원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많다. 그들의 주장대로 가난한 형편 때문에 가족이 피해자를 팔아넘기거나, 피해자 스스로 자원하는 게 대다수였다면 인구가 훨씬 많았던 중국 점령지의 여성들이 동원된 숫자가 훨씬 많아야 한다. 하지만 동원된 여성 가운데 조선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는 의도적으로 조선인 여성을 동원 대상으로 특정하고 의도한 것을 반영한다.
피해자들의 당시 연령도 유의할 사항이다. 정진성 교수는 피해자 175명을 조사했는데, 이중 156명이 만21세 미만이었고 18세 미만은 121명이었다. 심지어 14명은 11~13세 시기에 연행됐다. 북한 측에서 발간한 보고서에서도 조사한 119명 중 19세(한국식 나이로 추정) 미만이 81명이었다. 납치와 공갈, 협박, 사기에 상대적으로 더욱 취약한 미성년자가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다. 이는 일제의 동원이 합법적이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처럼 여러 상황과 자료, 증언을 검토하면, 피해자들은 그들의 주장처럼 자발적으로 지원하여 매춘부가 된 것이 아니라, 강제동원된 것이 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