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갔다. 병원은 사실, 뛰쳐나오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약을 받았다. 위장약, 신경안정제, 우울증 약 두 개와 수면제. 겁이 나지만 이미 먹었고 내가 나아지길 바라고 있다. -당시의 일기
정신건강증진센터(현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난 후, 나는 그날 바로 근처의 정신과에 전화를 걸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병에 대한 걱정이 큰 편이었다. 병원에 가는 것이 싫고 무서우면서도 확실하게 병이라는 게 인지되는 순간엔 고치기 위해서 당장 병원을 찾았다. 우울증이란 '병'에 걸린 것이라고 확신이 든 이상 나아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정신과는 후기를 남기지 않기에 정신과를 선택하는 방법은 다른 병원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당시의 나는 나름의 규칙을 세웠는데 그 방법으로 고른 정신과는 집에서 대중교통과 도보를 이용해 약 30분이 걸리는 꽤 먼 거리의 병원이었으나, 1년 넘게 잘 다녔다. 다녀본 결과 선생님도 매우 괜찮았고 그 지역에서 꽤 인기가 있는 병원인 듯싶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내가 선택했던 병원 대부분은 괜찮았기에, 내가 병원을 선택한 규칙에 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떨리는 마음으로 정신과에 처음 전화를 걸자, 초진이면 따로 예약 없이 6시 전까지만 병원에 내원하라는 답변을 들었다. 당시 전화를 받은 분의 목소리가 꽤 날이 서있는 편이라서 병원에 가기 전부터 불편한 마음이 쌓였다.
처음 병원에 가는 날, 가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 5시 40분쯤 병원 앞에 도착했다. 앞에서도 몇 분을 망설였다가 결국 마음을 잡고 해당 병원에 들어서니 의외로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대기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소파들이 거의 다 찼을 정도였다. 나는 접수처에 가서 오늘 처음 왔다고 말한 뒤 자리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거의 1시간을 기다리니 그제야 내 차례가 됐다.
진료실 안에는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계셨다. 나는 인사를 하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 뒤에는 큰 창이 있었고 창 밖 도시의 풍경과 가까이 흔들리는 가로수가 보였다. 내부에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고 몇 개의 화분이 함께하는 방 안 분위기는 따스했으며 선생님의 책상 위엔 다른 과와 다르게 티슈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건 모든 정신과의 공통이라고 봐도 될 듯싶다). 차트를 잡고 있는 선생님은 내게 무엇이 불편해서 왔냐고 물으셨다.
병원을 갔던 당시 나는 만 23살이었는데 그 때문에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셨는지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내게 반말로 이야기하셨다. 물론 그 이후로 간 모든 정신과는 존댓말을 했기에 이 병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독자야, 어디가 불편하니?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는데, 처음엔 뭐지?라는 생각이 들고,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나, 정신과는 원래 다 이런가 하고 불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상담을 한다고 보긴 어렵고 내과보다 조금 더 증상을 이야기하는 정도였기에, 실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내가 지금 힘든데 내 힘듦을 전혀 들어주지 않고, 내 증상만 급급하게 막으려고 약을 처방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상담을 30분 이상하는 병원이 아니었고, 그 이후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의 정신과가 5~10분 내외의 짧은 대화와 약처방이 중심이었다. 지금은 그런 걸 알지만 그걸 몰랐던 당시의 내가 당황스러운 것 역시 당연했다.
나의 첫 번째 상담은 10분 정도의 시간만 소요됐다. 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의 경험덕에 내 상태를 말하는 것이 조금 쉬워졌고, 어디가 아프고 뭐가 힘들다고 나름 가볍게 말할 수 있었다. 대화가 끝나고 다시 소파에서 조금 대기한 뒤, 검사지와 약봉투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다음 예약시간을 잡았고, 검사지는 예약 전까지 해오면 된다고 하셨다. 약은 아침, 저녁약을 받았고 아침약은 위장약, 신경안정제, 우울증 약 2개였으며, 저녁약은 거기에 수면제만 추가됐다.
2018년 10월 16일, 위의 일기를 쓴 당시의 나는 처음 정신과에 갔지만 낫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했다. 다만 첫 병원의 경험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전화받았던 사람의 불친절함과, 내 생각과는 달랐던 선생님이 다음 발걸음을 쉽게 내딛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나는 병이 생기면 병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 병원을 꾸준히 다녔다. 처음의 경험과는 다르게 병원에 가는 기간이 늘어가고 의사 선생님과 나의 관계가 가까워갈수록 더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깊은 상담까진 아니더라도 속마음을 말할 수 있었으며 지금 내 상황에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고치면 좋은지 같은 걸 차차 대화할 수 있었다. 선생님에게 반감이 들게 했던 반말은, 나중에선 나를 걱정해 주는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이게 바로 처음 또는 새로운 정신과를 갔을 때, 초반에 맞지 않는다고 바로 다른 병원으로 바꾸면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병원에 간다면 의사도 환자도 서로 알아가고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소 3개월 이상은 다녀보는 것이 좋다. 참고로 내가 가장 마지막에 다녔던 병원은 나를 완치까지 이끌어줬지만, 초반의 나는 그동안 겪었던 정신과 선생님 중 이 선생님을 가장 싫어했다. 최악의 선생님으로 여겼는데 가장 잘 맞는 선생님이었다니 길게 다녀보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었다.
처음 병원에 가기 전에는 너무 불안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정작 말하고 약을 받고 나니 감기에 걸리면 콧물이 나요, 기침이 나와요 증상을 말하듯 잠을 못 자요, 아무 힘이 안 나요 하고 말하면 되는 것이었다. 병원을 가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병이 시간에 따라 다 해결될 거라면 병원이 왜 있겠나. 당신이 감정이라 여겼던 것이 더 이상 감정뿐만이 아닐 수 있고, 당연히 시간이 지나서도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코뼈가 부러졌는데 알아서 잘 붙을 거라고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길 빈다. 아픈 것을 해결하고 싶어서 찾는 게 병원이다.
매주 병원을 찾고 약을 꾸준히 복용하며 내 우울의 양상은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았다. 당장 침대 밖으로도 나서기 어려웠던 게 전보다는 조금 더 낫고, 당장 샤워도 힘들었던 게 전보다는 조금 더 나은 딱 그 정도. 바깥에서 친구들을 만나며 일반인을 연기하는 것도 전보다 덜 힘들었다. 약은 어디까지나 날 보조해 줄 뿐이지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과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나를 살피는 기분이, 그동안 내가 나를 얼마나 살피지 않았는지도 알게 했다. 나는 항상 괜찮다고 믿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아도.
하지만 병원을 다닌다 해도 우울증이 한순간에 좋아지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우울증을 앓은 지 4년 차였던 내 상태는 많이 망가져있었다. 학사경고도 몇 번이나 받았고, 병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엔 2학기 시작한 지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났음에도 3개 수업의 F를 확정받은 상태였다. 우울증이 너무 심각하게 뇌를 망가뜨렸기에 기억력도 굉장히 나빠졌다. 당장 어제 있었던 일도 잘 기억하지 못했고, 뭘 하려 했는지도 까먹었다. 당시 스타벅스의 바리스타로 입사했으나 레시피를 외웠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 입사부터 퇴사까지 7개월간 매일 레시피를 다시 보고 출근했다. 모든 음식을 배달음식으로 해결했고 침대에서 나오질 않았다. 하루에도 기분이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고 작은 것에 화가 나고 예민했다. 스스로의 나태한 모습에 더 화가 나서 더 밀어붙이고 당연히 해낼 수 없는 상태면서 해내지 못하면 계속해서 자책했다. 안정과 같은 기본 상태를 아예 잃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병원을 다녔기에 전보다 나아졌다고 확신한다. 약을 꾸준히 복용했기 때문에 뇌의 능력이 떨어지고 집중이 어려움에도 계속해서 다시 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감정적인 피드백을 들어도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고 나름 높은 텐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약 덕에 일하는 와중에나마 기분이 덜 흔들릴 수 있었다. 매일 까먹어도 다시 외우면 된다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했고, 2개 남은 강의도 이미 망쳤다는 기분임에도 최대한 더 출석하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과제를 했고 조금이라도 공부를 더 했다. 병원도 약도 없었다면, 스타벅스에 다니는 것도 내가 망쳤다고 기분이 들었던 바로 그때 포기했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직면한 모든 고통에서 그냥 도망쳐버렸던 것처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점에도, 약을 먹었던 그때의 나와 약을 먹을 예정인 당신도, 또는 약을 먹는 당신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일기의 문장 중 독자님들의 신경을 쓰이게 하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겁이 나지만 이미 먹었고 내가 나아지길 바라고 있다.
나는 이 문장이 신경 쓰인다. 당시의 나는 분명하게 약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건강증진센터(현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의 의사 선생님께서 내 상태가 심각하기에 꼭 약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말을 따랐지만, 그럼에도 정신과 약에 대한 불안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나는 이 병을 꼭 치료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약이 필요하다면 약을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얘기한들 의사가 말하는 것만큼 나한테 더 필요한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겁이 난다 해도 약을 먹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신과약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다들 들어보셨을 거다. 먹으면 평생 끊지 못한다느니, 뇌를 교란시켜 큰일이 난다느니, 부작용이 어떻고 저떻고 말들이 너무 많다. 나는 당신이 이런 불안감을 쉽게 떨쳐내지 못할 것은 알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모든 것은 작용이 있으면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약뿐만 아니라 우리가 섭취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는 부작용이 있다. 고기를 먹으면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다. 누워있는 자세는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다. 사람들은 감기에 걸리면 내과를 간다. 감기약을 먹는 것이 감기를 낫게 하지 못함에도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서 병원을 찾고 약을 먹는다. 우울증이 걸린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내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단 건 일단 논외로 두자).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상처에 후시딘을 바르지 않는다거나, 핸드폰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 절대 아니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따져서 더 본인에게 맞는 선택을 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정신병에 걸려 생활도 못할 정도라면 그깟 부작용보다 약 먹으면서 삶을 살아가는 게 훨씬 맞는 선택인 거다.
처음 약을 먹기 시작한 2018년 10월 16일 이후로 나는 딱 한 번을 제외하곤제시간에 모든 약을 맞춰 먹었다. 약의 효과를 확실히 인식하고, 중간에 갑자기 끊는다면 병이 악화되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몸이 가장 소중했으며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기에 의사가 하지 말라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덕인지 심각하다고까지 생각되는 부작용은 없던 듯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작용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는 부작용에 겁먹지 말라더니 왜 이제 와서 부작용 얘기야?!라고 하신다면 내 실제 경험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짧은 상담과 약을 병행하며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행복하게 한 번에 완치가 된다면 누구든 정신병에 고통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약이 본인의 몸에 정확하게 맞기는 어렵고 어느 정도의 용량이 적절한지도 판단하기 쉽지 않다. 부작용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약을 먹는 것이 생활에는 훨씬 도움을 준다.
또다시 부작용 얘기를 꺼내는 것은, 실제 경험자인 내가 겪은 것을 바탕으로 당신 스스로 판단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내 병은 호전되는 듯하다 다시 처박히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나는 더 깊은 우울을 경험했다. 딱히 큰 문제가 없더라도 떨어졌고, 문제가 있으면 더 쉽게 떨어졌다. 같은 약을 먹고 있어도 그런 경험이 빈번했고 그런 상황이 오면 의사는 약을 교체하거나 증량하는 판단을 했다. 위에서도 말했듯 부작용이 아예 없을 수 없다. 병원을 다니며 다시 우울삽화가 왔을 때 한 약을 증량하자 처음으로 부작용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약을 먹는 게 훨씬 낫다고 여기지만, 아직도 약을 고민하는 당신의 판단을 위해 다음화는 그동안 겪은 약 부작용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