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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Apr 09. 2024

모든 사고는 억울하다

내가 다쳤을 때는 이미 우리 동네 모든 정형외과가 문을 닫은 뒤였다. 당장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일단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아킬레스건 파열'에 대해 검색했다. 원인이나 증상 같은 걸 찾아 읽으면서 나의 소중한 아킬레스건이 끊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희망 회로를 돌려본다면 완전 파열이 아닌 부분 파열이면 좋겠다는 것 정도 뿐이었다. 아픈 발목에 얼음팩을 대고 잠자리에 들었다.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잤다기 보다는 눈을 감고 병원 문이 열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었고 병원 문은 열렸지만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 줄 사람은 없었다. 남편에게 혹시 학교에 얘기하고 병원에 데려다 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책임감이 강한 남편은 출근해야 돼서 안 된다고 했다. 아파도 꾹 참고 이를 악물고 다녀오라는 섬뜩한 조언까지 덧붙였다. 다행히 다친 발은 왼발이라 오른발로 운전은 할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까지만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걸었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차에서 내리면 병원까지 또 걸어야 한다는 걸. 걸어서 1분 거리. 아무렇지 않게 나를 휙휙 스쳐 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나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 같았다. 힘겹게 다리를 질질 끌며 걷는 동안 다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환자가 되어야겠다고. 


의사 선생님도 내가 다친 이야기를 듣더니 아킬레스건 파열인 것 같다고 하셨다. 완전히 끊어졌다면 수술을 해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수술을 안 해도 될 수도 있다며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찍어보자고 하셨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다음은 초음파 차례. 종아리에 젤을 바르고 초음파 기계를 대고 문질문질하면서 화면을 보시던 선생님 입에서 "아이고" 소리가 나왔다. 마지막 희망이 무너졌다. 내 힘줄은 완전히 끊어져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일단 반깁스를 하고 목발을 처방받았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는데 주말에 입원을 하고 월요일에 수술을 받는 걸로 일정을 잡았다. 입원 기간은 2주 정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출근해야 하니 일주일만 입원하고 퇴원할 수는 없냐고 물었다. 그건 그때 상황 봐서 결정하자고 하셨다. 2주나 입원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데 2주 뒤에 퇴원을 해도 여전히 걷지 못할 거라는 건 그때도 몰랐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기 전에 나는 사소한 고민이 있었다. 썩 내키지 않는 모임에 나가야 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 모임에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냥 나가기 싫다고 말하긴 어려운 상황이었고 누구나 납득할 만한 핑계가 필요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핑계를 찾지 못했는데 모임 하루 전날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이제 모임에 못 나간다고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내가 못 나가는 게 당연해졌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무언가를 바랄 땐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병실은 4인실이었다. 대충 둘러봐도 내가 막내로 보였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일단 통성명을 하고 나이를 물으며 서열을 정리한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쩌다 다쳤는지 먼저 물어본다. 나는 넘어지지도 접질리지도 않았는데, 고작 두 걸음 달렸을 뿐인데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고 말했다. 내 말투에는 억울함이 잔뜩 묻어 있었는데 실제로 나는 억울했기 때문이다. 다른 환자분들의 사연도 들어보았다. 한 분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골절, 한 분은 마당에서 미끄러져 복숭아뼈 골절, 다른 분은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자기 쪽으로 넘어지면서 같이 넘어져 뒤꿈치가 골절됐다고 했다. 먼저 넘어진 사람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고. 얘기를 들어보니 누구 하나 억울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을 뿐인데, 마당에서 살짝 미끄러졌을 뿐인데, 넘어지는 사람 옆에 서 있었을 뿐인데 뼈가 부러져 병원에서 수술받고 누워있는 신세가 된 거다. 그들 모두 나와 똑같이 한 순간에 일상을 잃었다. 모든 사고는 억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조금 덜 억울해졌다. 아픈 상황에서도 농담하며 간식을 나눠 먹는 그들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환자가 되어야겠다는 건방진 꿈은 접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보다 유쾌한 환자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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