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으로는 의대지망생인 고1의 도전학생 시현 군. (본인의 개인적 꿈은 영어교사지만 집안에서, 아니 집안의 권력자이신 할아버지가 용납하지 못하시는 상황) 중등엔 전 과목 A의 성적으로 반짝이며 졸업했으나 갓반고(God +일반고: 특목고나 자사고가 아니지만 학업성취도가 매우 우수한 학교를 일컬음. 주로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고들)라 불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매우 낮은 성적을 받게 되어 티처스 문을 두드린 듯합니다. 학생의 외할아버지가 노인전문 병원을 운영하시는 의료법인의 이사장님이시고 부모님도 할아버지 병원의 의료부원장과 원무부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할아버지덕에 여유롭게 자랐지만 가업을 잇기위해 의사가 되어야 한다며 압박하는 장면들은 시청률을 위한 프로그램 설정이 아닐까 싶을 만큼 과도해 보입니다. 손자의 실망스러운 성적에 딸과 사위도 함께 혼내고 입시상담까지 동행하시는 할아버지라니요!
[사교육 과잉의존의 문제점 살피기]
어릴 적부터 많은 학원을 다녀온 도전학생. 실제로 기숙사에서 귀가하는 주말 스케줄도 온통 과외나 학원의 수업으로 빼곡하게 차 있었는데요. 학원 과외 뺑뺑이로 얻은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 학생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봅니다.
1. 자습시간의 절대적 부족
도전학생의 처참한 성적에 도전학생 어머님은 전 과목을 다 학원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십니다. 다행히 티처스 선생님들이 말려주셨어요. 학습은 말 그대로 배우고(學) 익히는(習)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 중 학학(學學)만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학교에서도 배우고 학원에서도 배우지요. 그런데 학원과 사교육으로 꽉 찬 나머지 익힐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말한 input과 intake의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리 input 양을 늘린다고 해도 익히는 과정을 통해 내 것으로 intake 하지 않으면 들어는 봤지만 알지는 못하는 뜬구름이 됩니다.
상위권의 아이들일수록 자습의 시간이 길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도 하루가 벅찬 거지요. 입에 음식이 들어왔을 때 씹지 않고 넘기는데 그 음식이 잘 소화되어 영양소가 쏙쏙 흡수되기 힘들지요. 음식을 먹는 것보다 잘 소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습習은 없고 학學만 가득한 스케줄
2. 사고력의 상실
정승제 선생님이 학생의 일상 중 학교 수학수업을 듣는 모습을 보고 수업 중 어려워했던 문제를 다시 풀려보고자 하시는데 학생의 솔직하고도 깜짝 놀랄만한 한마디를 듣게 됩니다. "문제가 길면 안 푸는 습관이 있어서."
채널에이 티처스 21회
문제가 길면 안 푸는 것을 술술 고백하는 순수함에 한번 놀라고, 긴 문제는 안 풀면서 입시의 성공을 바라고 있다는 점에 두 번 놀랐어요.
사교육을 어릴 적부터 많이 받아온 친구들의 가장 큰 폐해가 숙제에 허덕이느라 숙제를 빨리 끝내는 습관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교육 받는 과목마다 숙제가 많으니 숙제를 찬찬히 풀며 익히고 생각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숙제를 쳐내느라 정신이 없지요. 그러다 보니 찍어서 맞은 문제도 뒤돌아볼 여력이 없고, 한눈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못 풀겠다며 체크와 별표를 하며 빨리 넘겨버립니다. 학원 가서 선생님의 풀이를 구경하고 오면 그 문제들도 내 것이 되기 어렵지요.
3. 자기 진단능력과 메타인지의 소실
도전학생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중학교 때 실력이 안되지만 사정하고 부탁해서 심화반 그룹수업에 끼워 넣으셨다고 해요. 보충 과외(서브과외)까지 시켜가면서 참여했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 추측이지만 시현 군은 그때부터 정확히 이해 못 하는 수업을 받는 것에 적응을 해왔을 확률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그래서 몰라도 끄덕끄덕하며 그저 암기로 욱여넣어온 거죠. 타성에 젖어 그것이 잘 못 되었는지도 판단하지 못하고 그냥 묵묵히 버텨왔을 텐데 괴롭지는 않았을까요?
정승제선생님은 사교육으로 학대를 당했다고도 표현하시고, 저는 그 답답하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마냥 견뎌온 학생이 무던하다 못해 둔한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어요. 공부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이해하기 힘든 그 수업시간들을 그렇게 앉아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고, 부모와 할아버지의 꿈을 위해서 하는 공부니 부모님이 알아봐 주고 넣어준 학원과 과외에 들어가서 못 알아들어도 그냥 묵묵히 앉아 버텨왔을 겁니다. 사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자기 주도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티처스 승제샘의 솔루션]
선생님이 '기억'하지 말고 '생각'해서 풀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암기한 것으로 반사적으로 풀려고'만 하는 학생의 습관은 쉬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몇 번의 솔루션 수업을 진행하다 포기하고 싶어진 정승제샘은 도전학생의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가 아이를 믿고 모든 사교육을 중단하고 혼자 공부해 볼 기회를 주자는 제안을 합니다. 어머니는 불안해 보였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믿고 과외와 학원을 중단했습니다.
혼자 생각하면서 공부를 해 나가면 성적은 당연히 나아지겠지요. 그러나 도전학생의 경우 사교육에 기대지 않고 처음 해보는 홀로서기인 데다가 기말고사까지 남은 시간이 매우 짧아서 결과가 잘 나올까 싶었는데 그 효과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결과 확인은 티처스에서 하세요!)
무작정 암기만 했던 공식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를 차근하게 풀어나갑니다. 문제가 길면 안푸는 걸 '습관'으로 만들었던 학생은 그 습관을 버리고 급하고 시간이 없어도 한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그런 시간을 가지자 정말 놀라운 변화를 보입니다. 솔루션 초반에는 '어떻게 푸나요?'
'어떻게 푸는지 모르겠어요.'라는 질문만을 했던 학생이 어디까지 어떻게 생각해 봤는데 그다음에 무얼 어떻게 사용해서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그래프의 범위가 왜 나누어지는지 알려달라는 생각해 본 흔적이 가득한 질문을 합니다. 질문의 질은 생각의 질에서 나온다는 것을 또렷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일각에서는 금수저 아이를 뭐 하러 솔루션을 해주냐는 비판도 있는데요, 저는 이번 이야기가 돈만으로는 공부시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가 스스로를 믿고 공부하도록, 그 과정에서의 실수와 시행착오를 기다려 주는 것이, 좋은 과외선생님이나 학원을 찾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중간에 나오지만 도전학생은 집안의 기대와는 달리 '영어교사'를 꿈으로 가지고 있었어요. 물론 아직 영어교사가 되기에도 성적이 많이 부족하지만, 집안 분위기상 꽤나 무력감을 느끼기 쉬울 텐데도 학생이 원하는 꿈이 있는 그 모습이 정말 귀하고 소중해서 응원하고 싶습니다. 할아버지도 부모님도 시현 군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꿈을 말하고 이루어나가는 용기를 가지기를 응원해 봅니다. 40대의 저도 남의 기준으로 제 인생이 흔들릴 때면 되뇌는 말입니다. 도전학생에게도 힘이 되길 바라봅니다.
서두를 필요 없다. 반짝일 필요 없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될 필요도 없다. - 버지니아 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