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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Jan 17. 2020

흩날리는 옷깃속으로 네 커피 향이 느껴진 거야

2020년 1월의 버킷리스트

  3호선 지하철에 빠르게 몸을 싣는다. 오전 데스크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시계를 보며 숨 가쁘게 뛰어야 한다. 한쪽 손에는 아침에 먹다 남은 한입 베어 물은 초코바가 남아있다. 3호선 9호선이 맞물리는 고속터미널역, 여기서 여의도까지 급행을 타려면 빨리 뛰어야 한다.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고도 마음이 초조해 발끝에 힘을 주어 움직여야 그나마 괜찮아질 것만 같다.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바스켓에 담아서 다지는 도징 작업이 끝나면 꾸욱 눌러서 수평을 맞춰주는 탬핑 작업이 끝났다. 처음에 선생님의 설명도 어색했고 커피머신에 커피 바스켓을 어떻게 끼는지 몰라 ‘어떻게’라는 말을 남발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시간이 늘어날수록 커피 기계와 클래스 사람들과도 익숙해졌고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의 긴장감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간에는 에스프레소 추출하는 법을 배웠다. 선생님은 에스프레소를 추출할 줄 아니까 다 만들 줄 아는 셈이라고 했다. 아메리카노도 직접 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이제 아메리카노 만들 줄 아는 여자야’ ‘카페 아르바이트나 알아볼까?’ 라며 혼자 마음속으자랑스럽게 웃었다. 에스프레소는 누르는 압력, 바스켓에 담긴 원두의 양등에 따라 맛이 달라졌다. 뽑힌 에스프레소 잔안에서 황금빛 크레마가 반짝인다.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코끝으로 전해져 오다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그 향속에 오늘 하루도 괜찮다,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다정한 냄새가 섞여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뽑기 위해 분주히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순서가 정리되지 않아 물 흘려보내기, 행주로 닦기 등등을 가끔씩 잊어버렸지만 같이 해주는 학원 동료들이 한 번씩 짚어주어 또 어떻게를 외치며 하고 있었다. 어색하고 정처 없이 떠돌던 손이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내 몸 여기저기에서는 커피 향이 맴돌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아아 파야. 이 아아는 맛있는 거. 없는 거. 나름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했던 사람이다. 언제가 나이가 들어 커피가게를 차리지 않게 되더라도 커피 만드는 바리스타 자격증 공부는 꼭 하고 싶었었는데……. 이번에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룬 셈이다. 세 시간 동안 커피가루와 씨름하면서 에스프레소를 뽑으니 손에 커피 향이 잔뜩 배어있었다. 학원에서 뽑은 에스프레소를 텀블러 한통 반에 나눠 가지고 왔다. 선생님은 사각 얼음팩에 넣어 물에 타 먹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우유에 타 먹으면 아이스라떼가 된다고 했다. 직접 만든 수제 아메리카노인 것이다. 어느새 스웨터와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고소하지만 꿉꿉한 냄새가 배어들었다. 지하철 오호선 사람들 사이로 고소한 카페 향이 진동을 했다. 공기 중에 얼핏 맡으면 약한 캐러멜향 같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내가 빼꼼 고개를 들고 있다. 한 아이가 지하철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했다. 냄새의 출처는 어디일까. 아이가 말하는 냄새는 내 냄새일까? 좋은 냄새겠지? 잠시 후 어른 두 명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왜 커피집 향이 나지?"

"커피향 좋다"

 


‘어디선가 풀풀 나는 커피 향, 그래 커피 향 방향제 향수 사서 쓰는 사람도 있는걸. 괜히 움츠려 들지 말자 ‘ 나는 어깨를 더 당당하게 폈다. 학원에서 에스프레소를 뽑았을 때는 커피 향이 내 몸에서 나는지 몰랐다. 밖에 나가서 지하철을 타고 잠바에 코를 갖다 대 보니 내 옷에 커피 향이 배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는 찬 공기에 대고 킁킁 옷에 대고 킁킁 거리며 옷에 밴 커피 향을 맡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열심히 에스프레소를 뽑았노라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커피를 원 없이 연습했다 하고 내 하루를 응원해줬다. 하지만 커피 향이 심하게 났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텀블러 안에 넣어놨던 에스프레소가 새서 가방 안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웃긴일이다. 가방 전체에 흘리진 않았지만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숙지해야 하는, 데스크 자료 종이 끄트머리에 여기저기에 에스프레소 얼룩이 졌다.

"선생님 카레향 나지 않아요?"


커피가 살짝 묻은, 파일을 꺼내자마자 학원에서 한 아이가 내 뒤로 지나간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 가나요"






  지하철에서 좋은 커피 향은 가방과 종이를 닦았는데도 불구하고 진하게 남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왜 그런 노래도 있지 않는가.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라든가. 재밌게 개사를 해서 흩날리는 내 옷깃속으로 어제 만든 커피 향이 느껴진 거야가 떠올랐다. 나는 오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학원에 시간 맞춰서 가려면 환승을 해야 한다. 무겁고 자신감 없던 내가 실실거리며 가방 가득 커피 향을 한가득 싣고 지하철에 오른다. 걱정, 잘하는 것? 잘해야 하는 것? 그런 것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것에 오롯이 시간을 담는 것. 성공 실패가 아니라 진정한 내 시간을 보내며 집중할 수 있는 것 또한 용기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이번엔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낸 것이다. 내일은 스팀밀크를 한다는데 머리에서 우유냄새가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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