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 이 회차

지금의 나, 계속하시겠습니까

by 최물결

게임에서 지뢰를 밟아 죽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알림 창이 떴다.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이어서 살아볼 수 있다. 나는 계속하기를 다시 눌렀다. 어릴 적 악바리 근성이 강했던 나는 끝까지 승부를 봤다. 암 진단을 받았던 그 순간 내 삶은 게임오버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치료를 마치고 나니 또 다른 버튼이 눈앞에 나타났다.

“계속하기 인생 이 회차”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처음엔 같은 캐릭터지만 플레이 방식은 변한다.

내 삶도 그렇다. 치료 이후, 나는 여전히 나지만 어딘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게임은 아니지만 인생도 이 회차가 있을 거다. 사람마다 운이 바뀌기 전 인생의 큰 사건들을 겪는다는데 그게 지금 아닐까.


얼마 전 엠비티아이 검사를 다시 했다. 전 회사 동료들을 만났는데 엠비티아이 얘기가 나왔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누구는 이런 성향일 것 같다며 추측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와 같은 팀에 있었던 직원이 “이담 씨는 알 수 없어”라고 이야기했다. 내 차례가 되자 I와 E가 반반 갈렸다. 이 년 전 검사했을 때 나는 INFP(인프피)였다. 그러나 회사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나 일하는 방식에 있어 인프피와 동떨어져있었다.


새로 온 직원이 오면 먼저 말을 걸거나 시답지 않은 농담을 했다. 일하기 전 같이 협업하는 동료에게 가 괜히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재밌어서 일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기왕 하는 거 즐겁게 하는 게 좋지 않은가. 그러나 회사를 여러 번 이직하며 글쓰기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었고 말수도 점점 줄었다. 그래도 내 사람들에게는 늘 파이팅이 넘쳤다.

나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전 직장동료가 유료엠비티아이를 추천했다. 정확도도 높고 무료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로 엠비티아이 검사를 시작했다. 체크 전 주의사항이 쓰여있었다. 머리로 하나하나 정확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이런 상황에서 이랬을 거라고 직관적으로 체크하는 것이 좋단다. 결과는 의외였다. ENTJ(엔트제). 뭔가 낯설다. 두 어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 모습이 엔트제라는게 맞는 것도 같다. 2년 전 나는 작은 감정의 파동에 쉽게 흔들렸다. 회사에서 깨지면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안될까” 자책했다. 병을 진단받을 당시에는 심한 무력감을 느끼며 우울의 늪으로 빠졌다. 감정 다스리는 법을 몰랐다.


병을 마주하며 계획을 세우고 앞을 내다보게 됐다. 어쩌면 암이라는 큰 사건이 내 안의 리더십을 깨운 건지도 모른다. 살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나를 더 주도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병원을 가기 전, 일을 하기 전 철저히 준비한다. 상황을 정리하고 계획해야 앞으로 헤쳐나아갈 수 있기에.


2년 전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겼다면 지금은 아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듯 한 번 더 확인한다. 생각해 보면 리더 기질이 어느 정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학교 대외활동을 하며 큰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팀장직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다 같이 활동을 통해 등수를 매겼기에 팀원들에게 엄격했다. 나보다 나이 차이가 나는 오빠도 있었는데 열심히 하지 않을 때면 한 마디씩 쓴소리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러지 싶은데 당시에는 그랬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내가 하는 편이 나았다.


방향성이 없다면 내가 끌어보자는 생각도 강했다. 젊은 날의 패기이기도 했고 당시 성향이 그렇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엠비티아이는 작은 성향들이 모여 또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이다. 변한 엠비티아이도 마찬가지일 터.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살아낸 흔적이다. 감정에 기대어 흔들리던 삶에서 방향을 정하고 한 걸음씩 내딛는 삶의 모습. 이것이 인생 이 회차 내 모습이다.


어쩌면 이 깨달음은 다시 살아낸다는 증거다. 인생 2회차 나는 수동적이지 않다.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단단해진 나로 레벨 업 하는 중이다.

keyword
이전 18화여행은 멀리 가는 길이 아니라 나로 돌아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