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마치 인턴사원과 유사하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그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서툴지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부모는 처음으로 부모가 되고, 자식은 처음으로 자식이 된다. 배우자가 되고, 부모가 되고, 형제가 되는 것은 결코 익숙한 일이 아니다. 만약 부부학교나 가족학교가 존재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나은 가족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세상에는 그러한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처음이었고, 지금도 서툴게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흑백 영상을 보면, 10세도 되지 않은 소녀가 하얀색 기저귀로 동생을 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소녀 또한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의 가족도 인턴과 같다. 처음이기에 자주 충돌하였고, 처음이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서툴지만 나름대로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어설펐고,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이 글은 그러한 인턴과 같은 가족의 이야기이다.
나는 강원도 철원군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마을의 끝자락, 농지와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집은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부터 존재하던 집으로,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과 함께 우리 가족을 품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농사짓는 방법도, 가족을 책임져야 할 가장의 역할도 처음이었다.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일곱 형제의 어머니가 되는 일도 처음이었다. 우리도 농사짓는 농부의 아들, 딸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 모두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조용하고 세심한 분이었다. 아마도 MBTI 검사를 했다면 나와 유사한 ISTJ 유형이 나왔을 것이다.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고, 말보다는 기록을 남기는 성향이었다. 집에서도 조용히 술을 마셨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서재는 없었지만, 항상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적고 계셨다.
어머니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분이었다. 체구는 작지만 활력이 넘치는 분으로, 운동을 못하는 것이 없었고, 작은 체구로 우리를 번쩍 들어 올리곤 했다.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날, 내가 뒤처지자 어머니는 결승전에서 다시 역행하여 나를 업고 결승선을 향해 달렸다. 그날, 나는 2등을 차지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1등을 했을 것이다. 며칠 동안 내 손목에 찍힌 2등이라는 숫자를 지우지 않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성향의 부모님 아래에서 우리는 성장하였다. 흔히 유전자가 다를수록 자녀들은 건강하다고 한다. 우리 형제들은 육체적으로는 건강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땠을까? 서로 너무 달라서, 서로 맞지 않는 가족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리를 지어 행동하였다. 오빠들은 오빠들끼리, 큰언니와 나는 둘이서, 둘째 언니와 막내동생은 또 둘이서. 마치 회사에서 성향이 맞는 인턴들이 서로 의지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성장하였다.
가끔 생각한다. 왜 서로 맞지 않는데 결혼을 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향이 극과 극이었다. 아버지는 소극적이고 엄격한 편이었고, 어머니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분이었다. 두 사람은 결코 같은 길을 걸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였고, 가정을 이루었으며,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아 양육하였다. 서로 너무 달라서 오히려 균형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일까?
결혼은 단순한 사랑의 연장선이 아니다. 가족을 형성하는 것은 책임을 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부모님은 그러한 책임감으로 우리를 양육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때때로 너무 큰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가족이란 원래 이러한 것일까?
어릴 적에는 몰랐다. 왜 아버지가 항상 가족이 함께하는 식탁이 아닌, 안방의 낡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 술잔을 기울이고 계셨는지, 왜 어머니가 늘 부지런히 움직이며 집안을 정리했는지. 그저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보니,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힘든 하루를 술로 달래셨고, 어머니는 쉴 틈 없이 움직이며 하루를 견뎌내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부모님을 보며 성장하였다. 부모님도 처음이었고, 우리도 처음이었다. 처음이기에 서툴렀고, 처음이기에 상처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아버지의 웃는 얼굴과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모두 인턴이었다. 실수하고, 배우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 속에 있었다. 다만, 인턴은 실수를 해도 정직원이 수습해주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실수도, 오해도, 모두 우리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퇴사할수 없고, 폐업할수 없는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