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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배꼽 Oct 27. 2024

사라진 쌈짓돈

그리고 사라지지 않은 단 한 가지

    우리 집은 워낙 없이 살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언니와 오빠는 백일사진이나 돌사진이 있는데, 나는 그 사진이 없다. 나만 없다, 나만. 

    어릴 적, 집 앞에서 엄마가 어린 나를 안고 찍은 사진이 내 백일 기념의 전부였다. 그 사진 속의 나는 따가운 햇살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렸고, 나를 꼭 안은 젊은 엄마는 아주 밝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 감춰진 어려움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좀 더 괜찮은 곳에서 살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변해버린 것이다. 하필 타이밍이 그랬다.

     


    언젠가 TV에서 어떤 연예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망했어요.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굶어 죽지 않는다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그야말로 너무 없어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도 딱 그랬다. 이미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사업이 어렵게 되다 보니, 3대는 굶어 죽을 듯 한숨만 깊어졌다. 그런 뻑뻑한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아버지는 스웨터 공장을 했는데,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그래서, 엄마는 어쩌다 돈이 생기면 쌈짓돈을 이곳저곳에 숨겨두곤 했다. 은행에 맡기면 좋겠지만, 정작 우리 집이 돈이 없고 어려울 때는 그 은행마저도 우리를 외면했다. 집과 통장, 심지어 자존감까지 압류당한 적도 있다. 그렇게 우리 다섯 식구는 끼니 지체를 걱정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푼돈이 생기면 엄마는  비밀장소에 아무도 몰래 쌈짓돈을 숨겼다. 혹시 모를 가족의 끼니를 위해.


    

    "이게 다 뭐지?"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거실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또 무슨 일이지?'

빨래 바구니를 가져오더니 하나하나 들고 거실에서 털어냈다. 형형색색의 젖은 옷들 틈 사이사이에 작고 하얀 조각들이 보였다. 갈기갈기 찢긴 종이였다. 엄마가 하나하나 떼어내면서 말했다.

    "어? 이건 돈인데?"

엄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수표였다. 엄마는 내심 기대에 얼굴도 밝아졌다. 비록 너덜거리고 젖기는 했지만, 아직 큼지막한 부분도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 위로 숫자가 보였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찔했다. 수표라니. 그 수표가 지금 여러 조각으로 찢겨있다니!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와 나는 옷에서 종이조각 일일이 다 떼어냈다. 어느 것 하나도 잃어버릴까 봐 샅샅이 살폈다. 그러고는 거실 바닥에 거리를 두고 조금씩 펼쳐두었다. 그것들이 부디 빨리 마르기만을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쪽의 잘린 숫자를 저쪽 숫자와 맞춰보니 어느덧 수표 10장이 눈앞에 놓였다. 그래도 숫자가 어느 정도는 살아있으니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제발, 제발, 제발...'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저기, 수표가 작은 조각으로 찢어졌어요."

담당자는 덤덤했다. 그저 도울 방법이 없다고만 했다. 엄마와 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가 기껏 힘들게 맞춰놓은 수표 10장이 그저 종이일 뿐이라니... 마음이 쓰렸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금세 마음을 바꿨다.  

    "어쩔 수 없지 뭐." 엄마가 말했다.

    "응. 솔직히 이 옷을 안 빨았으면 어차피 여기에 돈이 있는 것도 몰랐을 텐데 뭐."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까.



    꽤 오래전의 일인데도 나는 종종 그 일이 생각난다.

 비록 돈은 잃었지만, 그 시절 나와 엄마가 함께한 애틋한 기억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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