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MZ 세대라고 불리는 9N년생의 나는 중학생 때 케이블 방송에서 나오던 얼짱 시대를 매주 꼬박꼬박 챙겨보던 열혈 시청자였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에는 훈녀 생정 싸이월드 배경음악
일촌신청 파도타기 투데이 지수에 열을 올리는 흔한 여고생이었으며 친구들과 열심히 찍은 60여 장의 사진들 중 심혈을 기울여 고른 사진에 굳이 역 삼각형 도형을 떡하니 삽입해서 홈피에 올려놓고 그 밑에 달린
댓글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기뻐하던 소심한 관종이었다.
이런 흔한 타이틀의 소유자였던 내게도 딱 하나,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는 능력이 있다면 그게 바로 ‘맛있게 많이 먹는 능력’이었다.
사실 내가 그 당시 얼마나 많이 먹고 맛있게 먹었는지를 설명하려면 끝이 없다.
그러나 지금 서두에서 할 이야기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피자 O에서 출시한 패밀리 피자 한 판을 다 먹어치웠어요.”
“대학교 1학년 때 1인 2 닭 기본으로 달고 살았습니다.”
“햄버거 최대 5개, 물론 세트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나는 낭떠러지로 몰렸을 때 기지를 발휘하는 변태적인 습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지금도 나름 즐겁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지만, 혹여나 나와 같은 병을 진단받고 괴로워
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단순하게 유머적으로 소비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저 맛있게 먹고 마시는 것이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나의 삶이 완전하게 달라진 계기는
작년 10월 판정받은 림프부종 진단 이후였다. 림프부종은 흔히 림프관이 막혀서 피하 조직에 림프가 괴어 단단해지고 부기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만성질환이다. 나의 경우는 ‘원인 불명의 림프부종’으로 1만 명 중 한 명이 걸리는 선천성 림프부종이라고 했다.
내가 열다섯 살 때부터 달고 살았던 오른쪽 다리의 부종이 사실은 평생 고칠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난치병 증상이었다니, 부종은 그저 오래 서 있어서 붓기가 올라온 상태라고만
알고 있던 나는 대학병원에 오기 전 스쳐 지나간 10곳 이상의 병원 의사들을 원망했다.
2년 전 급격하게 불어나버린 체중, 그리고 육안으로 보기에도 심각한 오른쪽 다리의 부종,
그저 약간 부어있는 정도였던 다리가 하루아침에 심각한 상태로 부풀어 올라
뒤늦게 찾아간 수많은 병원 의사들은 앵무새처럼 내게 같은 말을 반복했었다.
“원인을 알 수가 없네요.”
“별 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다들 짜고 친 것 마냥 똑같은 진단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눈물이 났다.
내과, 신경과, 산부인과, 정맥 외과, 정형외과…․ 어떻게 다들 원인을 모를 수 있을까,
스스로 탓하기를 좋아하던 내가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분들을 속으로 마음껏
원망하며 울었다. 그날은 어쩐지 내가 많이 불쌍해서, 그래서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도 돈은 벌어야 했으므로 나는 2주 입원 기간을 거치고 난 뒤 출근을 했다.
[노인 복지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사회 초년생으로 나와 처음 얻은 타이틀이었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탓일까, 몸이 힘들다고 비명을 질렀음에도 출근을 지속했다.
그리고 결국 출근을 하러 가던 어느 날,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에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걸을 힘이 없다’ 무섭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문장에
얻어맞은 듯 한참을 멍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그날은 20분이 지나고서야 겨우 일어나 출근을 할 수 있었고, 나는 지각을 했다.
문제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점점 그런 빈도가 늘어갔다는 것이다. 6시간을 자도, 8시간을 자도 해소되지 않는 피로감. 출근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오른쪽 발과 다리, 앉아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통증…․그래도 어찌어찌 6개월 간을 버텼다. 235 사이즈의 신발을 자연스레 신발장에 박아두고 260 사이즈의 신발을 구입할 때에도 55 사이즈가 아닌 77 사이즈, 플러스 사이즈를 자연스럽게 고를 때에도, 50분 거리의 출퇴근 시간마저 버겁게 느껴졌을 때도 찾아오지 않던 무력감은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고 말았다.
‘원래 예뻤었는데’
‘예전에는 말랐었는데’
‘살 되게 많이 쪘다’
그런 말들을 입에 올리지는 않아도 이미 눈빛으로 충분히 나를 걱정하던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예전의 나를 알지 못하는 초면부터 용감무쌍하고 무례한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아프게 만들었다.
-키 171cm / 82kg / 혈액형 A형 허리사이즈 (무서워서) 안 잼
숫자만 달라졌을 뿐인데 내겐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최고 몸무게를 찍고 겨우 74kg까지 감량했을 때도 나는 남들의 눈에 그저 관리 안 하는 살찐 사람으로 비친다는 사실이 나를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내 과거 사진들을 보여주며 사실은 이랬었다고, 나는 원래 날씬했다고, 아파서 이렇게 부은 거라고 열심히 변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방 한 구석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딱 한 마디만을 계속 반복했다.
“이건 살이 아니고 붓기예요, 님들아!”
결국 나는 그 날부로 자가 치료에 돌입하기로 했다. 우선 꾸역꾸역 가족들에게 나를 증명하고 싶어서 다니던 직장부터 그만두었다. 센터에서 얻는 보람, 좋은 사람들, 매일 쌓아가던 지식과 지혜들이 많이 아쉬웠지만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치료’라는 것을 깨닫고 나선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겼다. 이미 몸도 마음도 충분히 병든 나를 치료해줄 수 없다면, 전문 의학으로도 완치가 어렵다고, 수술을 해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한다면 나라도 나를 포기하지 말자
그런 마음에서 시작한 결심이 후회를 낳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스물여덟, 그 해 생일이 지난 2주 뒤 무사히 퇴사를 한 나는 블로그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블로그에 글을 올린 지 2달 만에 한 분의 댓글을 보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로
다짐한다. <선천성 림프부종 환자> 1만 명 중 한 명에 불과한 나의 케이스와 동일한
가족을 둔 한 분의 댓글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준 것이다.
매번 생각만 하던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분의 댓글 덕일지도 모른다.
나의 짧은 경험담과 무식하리만치 평면적인 답글에 무척이나 감사해하던 그분은 내게
동질감이라는 감정을 무척 오랜만에 선사해주었다.
올해는 내가 림프부종 투병 1년 째를 맞는 해이다. 사실 선천성이라고 하니 투병 28년 째라는 말이 맞지만 나는 투병 1년 째라고 하고 싶다. 병을 진단받기 전에 나는 병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인생에서 다신 없을 경험을 선사해준 이 병을 지금의 나는 아주 아주 싫어하고 아주아주 좋아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 그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숙제가 아닐까,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에 사랑한다. 그래, 나는 이 병을 영원히 사랑할 수 없기에 사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