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본 건

by 북도슨트 임리나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본 건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상자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상자를 연 판도라를 어리석다고 생각할까.

판도라 상자를 준 제우스. 그리고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했던 그 어쭙잖은 충고에 대해선 의문을 가지지 않는 걸까.


판도라 상자에 희망이라도 남은 건 그나마 판도라의 상황 판단이 빨랐고 타고난 순발력으로 상자를 닫았기 때문일 것이다.

판도라가 아니었다면 빈 상자만 남았을 텐데, 판도라 덕분에 희망이라도 남았으니 판도라에게 감사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절대 열지 말라고 하고 상자를 쥐어준다면 모두가 열어볼 것이다. 판도라는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렸던 것은 아닐까. 여주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완벽한 관계라도 균열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제 막 삼십 대가 된 여자가 서로 딩크족을 선언한 부부로 산다는 건 이 시대의 가장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남녀평등'까지 실현한 미래지향적인 부부라고.


하지만 딱 칠 년이었다.

사상누각이 아니라 처음에 모래조차 없었던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그때는 아주 느리게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페르마의 법칙처럼 가장 빠른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여주는 누군가 아이에 대해 물으면 일 초의 망설임이나 거리낌도 없이 딩크족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보통은 더 이상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가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가 없이 칠 년 살던 내 친구가 이혼했어."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남들의 '내 친구가, 나 아는 사람이, 내 주위에...'라면서 실어 나르는 풍문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여주의 가치관과 명문과의 관계는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철옹성이라고 믿었다.

왜냐면 두 사람의 가치관, 취향, 집안 환경까지 비슷했으니까.

어느 드라마에 나온 대사처럼 '끼리끼리'는 과학이니까.

'끼리끼리'가 과학은 맞는데 '끼리끼리'라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애초부터 명문을 '끼리끼리'라고 생각한 게 문제였다는 걸 그 일이 터지고서야 깨달았다.


그날은 그 사건이 없었다면 새털처럼 지나온 많은 날들 중에 그날이 그날인 하루였을 것이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저녁에 있을 강연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결혼 전부터 여주는 '연애 에세이'를 쓰는 작가였고 '연애 강연'을 하는 강사이기도 했다.

'연애하듯 사는 부부(연사부)'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자신의 일상을 올리고 있었고 제법 인기가 많았다.


반면에 SF소설을 쓰는 명문은 여주보다는 일거리가 적은 편이었다.

십오 년 전인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SF소설은 지금보다 더 마이너 한 장르였고 출간을 해도 초판을 팔기도 어려웠다. 그런 명문은 여주의 남편으로 여주의 강연장에 앉아 있거나 여주의 글에 이상적인 남편으로 소개되는 역할이 더 많았다.

여주는 명문의 그런 입장에 대해서 자존심이 상할 거라던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언젠가 명문이 더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그때는 자신이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상부상조'의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이가 없어서...', '여자가 남자보다 잘 나가서...'문제가 될 거라는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는 이미 다 극복한 인생이라고 믿었다.


여주가 커피를 한 잔 타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에 전원을 켰을 때였다.

명문에게 전화가 걸려와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에 몇 번 있었던 일처럼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의 통화 버튼이 또 눌려졌나 보다 하고 왜 스마트폰은 남자들 주머니에서만 저절로 통화버튼이 눌러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미스터리라며 끊으려는데 전화기에서 명문이 아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그때 날짜와 시간도 또렷이 기억한다. 노트북의 전원을 막 켜고 윈도 화면에서 날짜와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7월 21일. 오전 11시 29분.

여주는 잠결에 명문이 외출 준비를 하는 기척을 듣고 앞으로 출간할 새 소설의 편집자와 미팅이 있나 보다 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외출한 명문이 '오빠'라고 불리는 여자와 만나고 있었다.


그 이후는 정말 뻔한 클리세 같은 일들이라 더 이상 나열하고 싶지 않았고, 그 '오빠'리는 단 한마디에 여주는 상대가 누군지도 알아버렸다.


은주, 하은주였다.


그때의 충격은 글이나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하늘이 두 쪽 난다거나 땅이 꺼진다거나 뒤통수를 세게 맞는다던가, 이런 표현을 다 합쳐도 모자랐다. 지나가는 1톤 트럭에 받친 느낌이라는 것이 그나마 그 충격을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은주를 의심했다. 은주가 일부러 여주에게 알리려고 명문의 통화 버튼을 누른 게 아니었을까. 우연한 사고라고 보기에는 너무 뻔한 아침 드라마 같은 전개니까. 일부러라고 하면 아침 드라마에서 '실화 탐사'같은 범죄 다큐가 되고 여주는 아주 분명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상대가 은주라는 걸 알고 나니 명문의 외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퍼즐처럼 맞춰줬다.

은주와 명문과 셋이 처음 만난 날, 여주는 술 취한 은주를 혼자 보낼 수 없으니 명문에게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다.

여주는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친절함과 배려를 겸비한 남편을 잠시 은주에게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은주는 여주에게 찾아와서 자신이 연애를 왜 못하는지 상담을 했던 학교 후배였다. 나름 여주는 은주에게 최선을 다했다. 연애에 대한 마음 가짐부터 패션 첫 데이트 팁까지 잘 설명해주고 어서 빨리 좋은 남자를 만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다 언니의 도움으로 좋은 남자를 만났다며 그동안 연락이 뜸한 상태였다.


여주는 이성적으로 이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침묵하고 증거 수집을 시작했다. 자동차의 블랙박스를 명문 모르게 복사하고 핸드폰의 잠금 버튼을 풀어 캡처도 했다. 그러다 깨달은 것이 명문과 헤어지면 현재 여주의 일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과 그로 인해 자신의 생존이 위협된다는 것이었다. 명문과 이혼하면 당연히 수입이 필요한데 지금 수입은 다 명문과의 관계에서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여주의 일, 연애 상담, 연애 강연, 이 모든 것은 명문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과 결혼 과정 결혼 이후의 삶이 다 블로그에 박제되어 있었다. 명문과 헤어진다면 이 모든 일을 0으로 세팅하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본인이 명문보다 일이 많고 수입이 많다고 자부했었는데 명문이 빠지면 자신은 어떤 소스로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 갈등을 하면서도 만일에 대비해 소송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녹음을 하고 흥신소를 알아보고 주변의 변호사를 찾아다녔다.

반면에 행복한 척하며 부부 관계가 문제없는 미소를 지으며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나자 수면제를 먹지 않고는 1초도 잘 수 없는 불면증이 불청객으로 찾아왔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천국이 지옥으로 바뀌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옥은 공간이 아니라 상황이라고 했던가. 지난달 '행복이 가득한 집'에 인터뷰를 했던 것도 떠올랐다. 이제는 그 표지를 '불행이 가득한 집'이라고 바꾸어야만 할 것 같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혼이 뭐 대수라고 다 까발리고 새로 시작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변의 가장 친한 친구나 부모님에게도 '이혼'이란 말을 꺼내기 힘든데 불특정 다수에게 이혼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억울했다.

여주는 분명히 판도라 상자를 열지 않았다. 혼자 열려버렸다. 하지만 희망이 남아 있다면 닫을 용기를 내보려고도 했다. 상자에서 가장 먼저 희망이 달아나버렸다는 걸 명문의 가출이 있고 나서야 깨달았다.


"엄마!"

여주는 은비가 부르는 소리에 핸드폰에서 코를 박고 있다가 은비를 쳐다보았다.

"장영실에 대해서 알아오라는 숙제가 있는데 어떻게 해?"

여주는 대답 대신 은비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은비는 엄마에게 건네받은 핸드폰에서 검색 사이트의 앱을 켰다.

장영실을 입력하려는데 엄마가 검색했던 단어들이 떴다.

'김명문' 아까 현수막에서 본 그 작가 이름을 엄마가 검색했나 보다.

'엄마가 내가 북 토크에 가고 싶어 하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역시 엄마는 날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


<3편 보기>

https://brunch.co.kr/@jinnyim/151






이전 01화낮잠을 두 번 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