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도슨트 임리나 Dec 04. 2023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지 말라는 진짜 의미

개를 샀다.

물론 나도 안다. 이런 표현을 써서 안된다는 것을. 쌀을 살 때도 쌀을 판다고 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금기되는 언어 사용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샀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말 그대로 샀기 때문이고, 내가 펫샵에서 받은 종이에도 '매매계약서'라고 쓰여 있었다.


'강아지를 입양했다.' 이 표현이 가장 무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입양'이란 말을 강아지에게 쓰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이유는 사람 아이를 '입양'할 때도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입양 부모 카페에서 동물에게는 '입양'이란 단어를 쓰지 말았으면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도 그렇듯 사람들은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고 싶어 한다. 단지 이 구분이 이기심이나 생명의 차등의 의도라면 잘못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인간이 더 나으니 뭔가 좋은 결정을 해야 한다고 말할 때 사용한다면 나는 환영한다.


그때, 나는 반려동물이 없었기에 그 의견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강아지를 키우게 되니 내 입에서는 차마 '입양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샀다'라는 표현도 싫으니 '분양'이란 말이 내가 쓰기엔 가장 적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십 년 전 나는 딸을 입양했다. 그때, 마음의 결정을 위해 나름 입양에 대한 공부를 했는데 '남의 자식'을 키우는 편견을 깨게 한 글이 있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였다. 마치 이 말은 남의 자식을 키웠다가는 봉변을 당할 일이 있으리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기도 했는데 그 글을 쓴 사람은 '검은 머리'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말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모든 사람은 자식이거나 자식이 아니거나 가족이거나 가족이 아니거나 '배신'할 사람은 배신한다.


잊을 만하면 입양아에 대한 학대 사건이 보도되지만, 친부모의 학대가 더 많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친부모의 학대는 숨겨지는가 하면 '친부모'이기 때문이다. 단지 부모만이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다. 학대로 자신의 자식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걸 좋아할 부모는 없다. 그러기에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그러나 입양아의 경우는 오히려 입양아라 더 매스컴에 크게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분할 때 그 아이가 입양아라서 나는 더 슬프다.


지금의 입양절차 또한 쉽지 않다. 부모에 대한 검증을 최종적으로 판사 앞에서 판결을 받아야 하기에 절대로 쉬운 과정이 아니다. 나 또한 평생 처음 우리 아이를 입양할 때 판사 앞에 서봤다. 판사 앞에 선다는 것만큼이나 평범한 시민이 긴장되는 일은 없다. 그런 과정과 검증 덕분에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입양 후, 많은 엄마들(입양 엄마를 포함하여)을 만나 본 나의 결론은 입양 부모냐 아니냐 전에 '괜찮은 사람은 괜찮은 엄마가 된다.'라는 다소 상식적인 진리를 발견했다. 어찌 보면 할머니가 아이를 키우는 경우도 자식의 자식이지만 낳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엄마가 되고 생활은 많이 변하지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엄마가 된다고 특별히 악해지지도 착해지지도 않았다.


아이를 키운 지 십 년. 아이는 동생, 강아지. 고양이 중에 하나를 나에게 내놓으라고 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이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엄마들은 그렇게 한 때 지나가는 아이들이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조금 지나면 조르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아이의 말에 가장 흔들린 건 나였다.

나이 많은 엄마가 또 큰 병을 앓았던 엄마로서 아이와 추억을 만들 시간이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아이와 함께 강아지를 키우는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물론 핑계는 '아이가 키우고 싶어 한다.'였지만.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강아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가끔 동네의 펫샵을 지날 때 아이가 꼭 구경하고 지나던 그 펫샵을 갔고, 가장 아이와 내가 눈길이 가는 강아지를 데려왔다.

그러나 데려 오고 나서야 알았다. 유기견을 데려오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물론 유기견을 분양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미 아이가 마음에 찍어둔 강아지를 두고 다른 강아지를 알아보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방법이 강아지를 고르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미리 유기견의 방법을 알았다면 유기견 보호소로 아이를 데려가고 그곳에 대해 알려주고 결정하는 방법으로 유도했을 수도 있었다. 이건 내가 잘 몰랐던 것이라서 지금도 후회된다.


심지어 그즘에 어느 도시에서 '강아지 공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동물보호단체가 대량으로 강아지를 구출한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강아지를 펫샵에서 데리고 온 것이 양심의 가책이 되어 괴로울 때 나는 스스로 '잘 키우겠다.'라는 다짐으로 마음을 돌렸다.


지금 강아지도 그리고 보니 검은 머리다. 나는 검은 머리 짐승 두 마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하다.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면 안 된다는 말은 사람을 거두는 일에 대한 신중함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두고두고 그 말을 곱씹으며 아이와 강아지에게 최선을 다하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나의 인생은 개판이 되었다.

  

나에겐 너무 사랑스런 두 아이들

이전 01화 윤동주, 정호승을 거쳐 내 인생이 개판이 됐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