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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도슨트 임리나 Nov 27. 2023

윤동주, 정호승을 거쳐 내 인생이 개판이 됐다

이 모든 일은 시 한 편으로 시작되었다.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호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 봐 두려워라


정호승 시인의 이 시를 읽자마자 나는 정호승 시인에게 빠져 들었다. 정호승 시인이야 워낙 유명하고 '수선화에게', '우리가 어느 별에서', '슬픔이 기쁨에게' 등,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시도 많지만  나는 이 시를 최고로 꼽고 싶다.


올해 초, 이 시를 읽을 때만 해도 나는 개를 키울 생각은 개눈곱만큼도 없었다. 요즘 표현으로 1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 시를 읽으면서 개의 배변 실수 하나로 인간을 통찰하고 이렇게 멋있는 시가 탄생했다는데 감탄에 마지않았다.

시인의 말대로 시집을 읽고 시를 쓰는 시인이면서도 강아지 한 마리조차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의 이중성을 어쩌면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 훔치고 싶은 재능이었다.

혹시 나도 강아지를 키운다면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아니 시는 못쓰더라도 지금까지와 다른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개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오십 년 넘게 개 없이 살았다면 이제 개와 함께 사는 것도, 즉 내 인생이 개판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개가 있어 인생이 개판이 되기 전에 어쩌면 내 인생은 개판보다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다소 우아하고 품위 있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는 착각을 깨트린 것이 결혼이었고, 그 후로는 육아를 하면서 남들이 '아줌마'리고 하는 그 현상들을 몸소 겪으며 우아함이나 품위 따위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물론 이 나이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나름대로는 품위가 있는 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편'이다. 품위가 있는 게 아니라 품위가 있는 편. 우아한 편, 조용한 편..... 이렇게 '편'이 쓰이면 정확하게 품위 있고 우아하고 조용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우아함이나 품위 등등은 가짜라는 의미다.


정호승 시인이 윤동주 시인을 언급하며 강아지 얘기를 했다면, 나는 윤동주 시인을 언급한 정호승 시인까지 언급하며 강아지 얘기를 하려고 한다.


'강아지로 인간을 통찰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  이 글의 여정인데 왠지 진정 개판 이어야지만 가능할 것 같다. 하루아침에 내 인생은 개판이 됐다. 말 그대로 개와 동거가 시작되었으므로.

 2023. 9. 2. 우리는 처음 눈이 마주쳤다. 나는 윤동주 시집도 정호승 시집도 들고 있지 않았다. 인생이 개판이 되는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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