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무거워질수록 책을 읽는 것이 불편해졌다. 또렷했던 문장과 언어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책 읽는 양과 종류도 고집스럽게 변해갔다. 좋던 나쁘든 간에 책 읽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책 읽는 삶이라는 있을 수 없으니까. 여전히 평범한 삶 속에서 책과 함께 벗할 수 있어 좋았다. 잘 살기 위한 삶으로 가야 한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부여해 주니.
여행을 갈 때, 출근을 할 때, 때론 등산을 갈 때도 나는 늘 책 한 두 권을 챙겼다. 책이 없다면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했던 시간에 가슴에 와닿는 문장을 만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렇게 일 년에 100 여권 이상의 책을 읽어왔었다. 독서 후에는 밑줄 그은 좋은 문장을 찾아 개인 SNS에 서평을 썼다. 이런 루틴이 지속될수록 나의 독서하는 일상이 기대이상으로 좋았다. 일 년의 자기 평가이자, 나를 들여다보는 만족감의 실현이라 할까. 이렇게 좋은 루틴의 삶이 없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사람에게 기회가 되면 알리고 싶었고 좋은 반응이 돌아오는 것도 느꼈다.
독서를 생활화하면서 좋았던 것은 대화나 질문을 할 때 심오한 말들이 단순히 흘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말과 글에서 자기만의 언어가 있겠지만 더 많은 독서를 하고 나면 글의 언어로 연결하는 힘을 느꼈을 때 그 짜릿한 전율과 감미로운 감촉을 오래 남길 수 있다. 고전부터 역사에 도달할 때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불가피했다.
철학자의 사상과 사유의 깊이, 과학자가 전하는 물성의 힘, 문학자, 역사학자, 예술가 등 그들이 전하는 문장의 깊이는 나를 짓눌렀고 유레카 같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주었다. 종종 잔잔한 일상의 변화에 잔물결을 넣었고 고퀼리티 한 삶을 줄 때 독서는 신 이상으로 섬겼다. 인생의 한 줄기 에너지 같은 것이 독서임에 틀림없었다. 이심지 작가는 “어떤 독서는 타인을 힘껏 껴안는 서투른 포옹 같은 것이라고”.
독서는 정답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나다운 대한 ‘나’를 알려주었고 의문의 ‘질문’을 쉴 새 없이 던졌다. 위로를 해주었고 삶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 주기도 했다. 책 읽는 방법이 다르니 받아들이는 방법 또한 달리 보아야 한다. 누구는 어느 문장에서, 또 누구는 이런 문장에서 밑줄을 그을 수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고 다양한 책도 읽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한 권의 책을 오롯이 흡수하고 스며들어 가야 한다. 치명적인 열정을 가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처럼 자지자신에 대한 충실한 삶이 돋보이는 것도 필요하다. 책은 그런 충실한 삶을 가장 잘 들여낸다. 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책이다.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미국의 기업가 샌드버그는 “우리는 모르는 것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뭔가를 알게 됐다면 그것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독서가 좋은 예다. 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를 잘 알고 있지만 무조건 바꿀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면의 성장을 넘어 경제적 부까지 이루어 줄 독서를 우리는 깨닫고 행동에 옮겨야 할 때이다. 독서로부터 삶이 변화가 시작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어떻게 변화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독서는 절대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