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다!’ 냉소의 말은 매년 매체나 뉴스, 다양한 곳에서 익숙하게 흘러나온 문장이었다.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독서풍토는 여전하다. 많은 것이 변해도 읽지 않는 것에는 쉽게 동조하고 변할 수 없는 것일까. 사실 ‘읽는다’라는 것은 선천적이라기보다는 후천적 행위에 가깝다. 오죽하면 독서에 대한 다양한 명언과 방법을 알리는 문장, 유명인들의 경구, 독서 관련 책 등 독서캠페인이 연신 쏟아져도 읽지 않는 사람은 읽지 않는다는 사실. 책은 가장 오래된 미디어지만 온라인 미디어 매체에 밀려 가장 홀대되고 있는 미디어 도구가 되었다.
책을 읽는 독자도 책을 읽지 않는 독자도 읽는 방법에 대한, 아닌 읽는 것에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누군가의 조언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는 좋은 독자도, 사서도, 독서가도 솔직히 만나기는 어려운 상대는 분명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책에서 작은 희망의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읽기 장애’ ‘읽기 장벽’ 대신 ‘읽기 차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읽는 존재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읽는 사람’과 ‘읽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하지만 결국 우리는 읽지 않기 때문에 읽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읽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쓴 매슈 루버리는 “읽기에 정답이 없듯 이 책을 읽는 방법에도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이 책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곧 내가 ‘읽기’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을 잘 읽지는 못해도 읽는 행위 자체에 ‘괜찮은 일 아닌가?’ 하는 말 한마디가 지금의 시대에 필요하다. 잘하고 있다고, 책을 잘 읽고 있다고 하는 칭찬의 말 한마디에 책 읽을 용기가 서서히 나타날 수도 있다.
비독자와 독자는 마음에서 오는 차이다. 책을 어떻게 대하는 방향에 따라 독자가 될 수 있는 독서여건이 생겨난다. 책을 읽는 훈련과 습관, 마음에서 오는 용기를 불어넣는 독서훈련을 꾸준히 길러내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기본적 독서행위는 앞으로도 필요이상으로 습득해야 할 기본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비독자는 책에 대한 좋은 경험이 부족하고, 독서에 대한 가치 인식이 부족하지만 간헐적 독자로 언제나 읽는 독자로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 1%의 가능성을 위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할 때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비독자라면 남아있는 희망의 끈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독서를 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과 의욕을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하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비독자를 위한 갈망의 지원이 필요하다. 독서가 만드는 깊은 사고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관능적 읽기에 빠져 책을 읽지 않는 비독자를 도울 사회적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가까운 동네 도서관과 책방에서도 비독자를 위한 독서 리터러시 교육을 지원하는 것도 지금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이다. 함께 읽는 모임도 좋다. 읽는 생활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독서 멘토가 많기 때문이다. 멘토의 독서 조언으로 한 마디의 언어 속에 단단한 독서가 자란다.
“책 속에는 뭔가 우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들어 있어. 그 여자로 하여금 불타는 집 속에서도 빠져나오지 않고 남아 있도록 만드는, 분명히 뭐가 있어. 그저 불타는 집에 남아 있었을 리가 없어.” ‘화씨 451’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