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 친구한테 함부로 하지 마이소!

by 해피영희

“아~ 진짜 어디 갔지?” 다음 수업이 진행되기 전 헐레벌떡 강의실로 뛰어갑니다. 평소에도 힘든 경사진 도로는 바쁜 걸음을 엄청난 자력으로 붙들어 당기는 느낌입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낡은 나무책상이 놓여 진 대학 강의실을 샅샅이 뒤지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다녔던 동선을 따라 눈에 불을 켜고 살펴 보지만 사라진 지갑은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돈에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혼자 농협을 가서 온라인 통장을 개설하고 야무지게 돈 관리를 하던 제게 지갑을 잃어버리는 일은 좀 체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입니다. 초 긴장상태로 대학캠퍼스를 헤매고 다녔더니 몸도 마음도 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21살이라는 나이도 잊고 부끄럽게 눈물이 글썽글썽합니다.

“괜찮다. 오빠야가 지갑 새로 사줄게. 그게 뭐 중요하다꼬..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3달 전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신청을 하러 온 89학번 선배였던 남편과 제법 가까워져 가던 어느 날 그 사건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맛있는 저녁을 사주고 만원 3장을 건네줍니다.

“아놔~ 차비다. 지갑은 내일 사 주게”


처음 느꼈던 슬픔은 사라지고 묘한 든든함과 위로를 마음가득 안고 집으로 가는 버스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심한 몸살감기가 걸렸습니다. 온몸이 너무 아파 수업도 겨우 듣고 남편의 자취방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증세가 점점 심해져 오후가 되자 의식이 희미해질 정도였습니다. 몸이 아프면 인간에게 찾아오는 첫 번째 반응은 졸음이 온다는 겁니다. 몸이 살기 위해 비상사태를 발동시키는 거죠.


그렇게 저는 모든 걸 내려놓고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조용히 이마를 만져보더니 따듯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영희야, 약 먹고 자라~ 오빠야가 죽도 끓였다.”

남편은 하얀 흰죽과 더불어 간장종지와 약봉지를 얌전히 옆에 둔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몸이 아프니 흰죽의 쓴맛이 강하게 올라오지만 짭짤한 간장 한 포인트가 묘한 입맛을 붙들어 줍니다.


억지로 죽 먹고 약 먹고 또 잠이 듭니다. 그사이 남편은 수건에 물을 적셔 이마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바라다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숨을 푹 자고 나니 ‘휴~~~’ 하고 몸 안의 무언가가 쑥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남편은 아픈 저를 버스로 1시간 걸리는 집까지 데려다주는 마지막 기사도 정신까지 제공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남편에 대한 예민한 경계심이 사라지고 마냥 순진한 아이마냥 한없이 마음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연인이 되고 유치함으로 세상이 물들고 사소한 기쁨으로 꺄르르 넘어가던 그 시절 마냥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방안 작은 책상에 선을 그어두고 미니탁구 시합을 했습니다. 승부욕이 강했던 저는 순간순간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인아주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좀 조용히 해라. 우리 아들 어제 야간근무하고 자는데 시끄럽다 아이가~ 뭐가 그리 시끄럽노.”


아들의 숙면방해에 분노한 엄마의 목소리가 얼마나 위협적이던지 저는 시무룩하다 못해 놀란 토끼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남편이 그러는 겁니다.

“아주머니,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미더, 그런데 좋게 말할 수도 있다 아입니꺼. 아무리 그래도 내 여자 친구한테 함부로는 하지 말아 주이소”


아~ 얼마나 박력있던지요.

‘그래. 이 오빠라면 평생 나를 지켜줄 것 같다. 든든하게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겠다.’

그렇게 둘은 얼레리 꼴레리 28년을 함께 살고 있네요. 그런데 아무래도 남자라는 생물학적 특성은 유아기로 퇴행하는 어떤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패기와 스마트함이 점점 쪼그라드니 말입니다. 오늘은 아침 먹으라는 닦달에 식탁에 앉더니 자기는 달걀 프라이를 해줘야 밥을 먹을 수 있겠다는 겁니다.

분명 아이가 되어감에 틀림없습니다. ㅋ


그럼에도 여전히 남편은 아이들과 제게는 울타리 같은 존재입니다. 좀 전의 모습과 달리 제 차의 엔진오일 바꿀 때가 넘었다며 차키를 달라하더니 점심시간에 직장으로 차를 가져다 준다합니다.

여전히 우리 오빠는 멋있습니다. 사실 뭐 부부가 연애 할 때의 감정으로 살다가는 조울증에 걸리기 딱 좋습니다.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시간 앞에는 무수한 삶의 시험대가 지나갑니다. 참으로 만만치 않은 것들이라 어린 시절 얄팍한 막으로는 방어가 될 수 없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삶의 굴곡이 차곡차곡 쌓여 갈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속에 우리는 감정의 굳은살이 박혀갑니다.

그러다 이렇게 불현듯 또 보드라운 속살의 감정을 만나는 날이면 오래전 추억 하나 소환되고 마음은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고 갑니다. 어쩜 사람은 가슴속 잠들어 있는 그 추억 하나로 평생을 살아가는 비이성적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다행입니다. 그 보석 같은 감정이 아직은 잘 살아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어린 시절 힘들 때 마다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사람, 그 든든함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많은 게 변했지만 여전히 남편은 든든한 울타리이고 기둥입니다. 그럼 되었지요. 그럼요. 그 믿음이면 두려울 게 하나도 않습니다.

“여보야~ 내가 담에는 계란 프라이 좀 더 예쁜 표정으로 해줄게~ 건강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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