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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영희 Mar 18. 2022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각자 알맞은 시간이 있다


가끔 고등학생들에게 컨설팅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파릇한 새싹을 만나는 느낌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 합니다. 여리고 예쁜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떠 오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가능성이 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


주로 공부를 하고 싶은데, 아니 해야 하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아 마주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마다 그 친구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ㅇㅇ아 선생님이 나이가 50살이야. 그런데 지금 잠도 안자고 죽을 듯 공부해서 서울대를 입학했어. 그럼 그게 좋은일이야 나쁜일이야?”


일단 서울대가 주는 상징성은 너무도 강력해서 대부분은 대단하고 축하할 일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럼, 선생님이 서울대를 졸업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선생님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일을 하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성공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에 오면 아이들은 몰라도 제 자신은 별 고민없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먼저 튀어 나옵니다. 아무리 서울대라해도 모든 기본을 축척하는 몇십년 세월을 뛰어넘고 도달할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난 세월동안 낮은곳에서 제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그것들과 바꿀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관점과 대상이 눈앞에 있는 그 아이들에게로 옮겨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ㅇㅇ아 이번에는 네가 정말 노력해서 서울대를 입학했어. 그럼 어떻게 될까?”

뭐 이건 누구도 이견없이 대단한 일이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 일이라고 동의하게 됩니다.

정말 그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얼마만큼 할지 아무도 모르고 상상만으로도 가슴뛰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ㅇㅇ아 사람에게는 할수 있는 때가 있는거란다. 똑같은 일을 해도 그 가치가 달라지는 거야.”

사실 저도 학창 시절에 이런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늘 선생님들이 말씀하셨죠.

“공부도 다 때가 있다. 해야 할 때 해라.”


사람이 어릴때는 삶의 진리를 눈앞에 만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 기회들이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면 너무도 선명하게 그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정작 그 노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는 흥청망청 살았지만 뭔가 알뜰해 보겠다는 지금은 정작 그 기회의 문들이 다 닫히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난이도를 만나게 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맞는 풍경이 있고 그 시기에 만날 수 있는 식물과 꽃과 열매가 다릅니다.

제철이 아닌 시간에 뭔가를 해보려 하면 그 고달픔도 말할 수 없지만 결국 생존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사람도 그런것이지요


따듯한 햇살이 내려오는 봄에는 빼꼼히 싹 틔우는 것이 수월하고 뜨거운 여름에는 쑥쑥 자라나기를 하고 선들한 가을바람에는 단단히 영양소를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을 만나면 또 성장하기 위해 휴식을 하는 겁니다.


이 흐름을 엇박자를 내는 순간 참 인생 꼬였다는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하는일마다 어렵고 넘어지고 깨지는 시간이 다반사가 될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말하지요

‘나는 재수가 없어. 되는 일이 없네’



될 수 있는 시기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결과가 나올 리가 없지요.

아니 결과가 나온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요?

지나간 일은 무엇이든 그 과정이 선명하고 쉬워 보이지만 정작 그 일을 하던 당시에 상황을 제대로 알고 한 것들이 많지는 않은 듯 합니다.


제 삶을 뒤돌아봐도 그럭저럭 소 뒤발치다 쥐 잡았다는 표현의 시간이 보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모두 그때는 그것이 꼭 필요한 일들이었다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 역할보다는 직장인 역할을 우선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바로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엄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엄마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의 평화를 만났습니다. 돈, 질병, 인간관계 모두 그 순간 해결해야 할 적절한 타이밍이 있습니다.

배고픈 이에게 그 순간을 외면하다가 배부른 시간에 넉넉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그 사람을 두 번 힘들게 하는 행위입니다. 배고픔이라는 고통과 과식이라는 불편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행위이지만 그 순간의 필요성에 따라 천지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절대적 행동은 무엇일까요?

그건 사람마다 다릅니다. 취업공부, 입시공부, 돈벌이, 글쓰기, 운동, 요리, 아이와 놀아주기 등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날거구요.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크고 작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 갑니다.

큰 장기계획도 있고 당장 오늘 저녁 장보기 같은 단기계획도 있습니다.

오미크론인지 감기인지 근육통이 심하게 괴롭히는 며칠입니다. 과거의 습관이 남아 통증을 억지로 참고 근무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있는 나를 봅니다. 문득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PCR 검사를 받고 따듯한 매트에 잠을 청합니다.

쉬어야 할 때 쉬고 검사해야 할 때 하는 것이 나와 주변인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니까요.

고개 들어 보니 며칠 전 썰어 말려두었던 표고버섯이 바싹 줄어든 것이 보입니다.

지금쯤 봉지에 담아야 적절한 질감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렇게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각자의 알맞은 시간이 있습니다.

2022.3월의 중순, 어둑해지는 하늘이 알수 없는 그리움을 주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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