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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Aug 16. 2020

집의 규칙 1: 부모의 기분을 살펴라

생존 규칙처럼 몸에 각인된 첫 번째 기억

* 이번 글에서는 가정 내 언어폭력을 포함한 각종 폭력과 압박, 강요 등에 대한 각종 트리거 주의가 필요한 장면이 있어 유의 부탁드립니다.





전 편에서 갑작스럽게 꿈을 포기하고 부모가 되기로 결정한 두 남녀의 이야기는 물론 나의 부모가 들려준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그들은 자주 그런 과거사를 내 앞에서 단편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것이 마치 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도 된다는 듯이.


부모가 부모가 되기로 결정하여 본인들의 꿈을 포기하고 생계와 현실에 안주하였다고 할 지라도 그 사실에 아이가 죄책감을 느끼거나 나를 위해 희생을 하셨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나중에 어른이 되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의 그런 선택에 감사함을 넘어 일종의 죄의식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며 이불속에서 혼자 흐느낀 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탄생은 젊고 재능 있고 꿈이 많은 두 남녀의 인생을 완전히 말아먹은 것이었다. 그 죄책감은 내 부모에게 훌륭한 고삐가 되어주었고 이 또한 어른이 된 후 뒤늦게 알았다.


더불어 내가 태어난 것을 진심으로 송구스러워 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나의 아버지 되는 분께서 4대 독자 신분의 귀한 아들인지라 그 첫 번째 자식으로 덜컥 들어선 나의 성별이 주목받은 것이다. 엄마는 기왕지사 이렇게 덜컥 애부터 가져 결혼하게 될 바에는 진심으로 아들을 낳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조금 더 환영받는 아기를 낳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진심으로 바라고 바랐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결과는 보다시피 딸이었다.

아직 10살도 되기 전이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네가 태어난 후 성별을 묻자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너무 화가 나선 소주를 몇 병을 마셨는지 모른다고. 병원에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고. 계집애를 낳아다 어디다 쓸 것이냐 생각했노라고.


그 이후 할아버지는 그럼에도 네가 이렇게 똑똑하고 야무진 것을 보니 계집애라도 너는 이다음에 한몫 톡톡히 할 재목인 것이 보인다는 칭찬을 보탰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그런 칭찬에 으쓱해지지 않은 것은 애초에 나의 탄생 그 자체를 축하하지 않은 혈연을 향한 원망과 함께 부모를 난처하게 한 내 탄생이 속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똑똑하고 야무지지 않다면 결국 나는 '태어날 필요 없는 쓸모없는 계집애'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들렸던 것도 한몫했다.


그 이후 다행스럽게도 남동생이 태어났고 내 부모는 평온을 찾았다. 이미 버린 꿈보다 손에 쥔 현실을 최대한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목표 의식이 그들을 부부로 만들었다. 첫 아이는 계집애지만 잘 키워놓으면 우리가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게 해 줄 것 같고, 둘째 아이는 그냥 막내둥이에 애교가 많고 순했으며 심지어 5대 독자 아들이었다. 이만하면 가족으로서 기본은 되었다고 내 부모는 자부했다. 인생과의 승부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부모 중 주부 역할을 맡은 엄마는 나의 죄악감을 일찍부터 눈치를 챘다.

"넌 어린애치곤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았다. 너는 부모를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았어. 난 그 본능적인 처세에 네가 정말 똑똑한 아이라고 기대했지."

엄마가 나중에 내게 해 준 이 말은 그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나는 똑똑한 아이가 아니라 상황을 숨죽여 살피는 아이였다. 

조금만 살피면 어른들의 얼굴에선 좋고 싫은 감정이 잘 보였다. 질문하지 말아야 할 것과 모른 척 시선을 돌려야 할 것들도 공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재능이 모든 아이에게 있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양육자가 생존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되도록 양육자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그 감이 발달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동생은 달랐다. 그 애는 정말 어른들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을 많이 했다. 친인척 사이의 미묘한 경계와 감정들을 그 애는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생은 질문하고 싶은 대로 질문하고 듣고 싶은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으며 어른들의 표정을 무시했다. 물론 이 또한 나중에 깨달았지만 동생은 나처럼 공기를 읽을 필요가 없었다. 그 애는 환영받는 탄생이었으니까. 



학교에 입학하고 저학년임에도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했다. 받아쓰기는 항상 만 점을 받아야만 했고, 어떤 과목에서도 남에게 뒤쳐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자그마한 내 책상에 앉아있으면 아버지가 느지막이 퇴근하여 그 모습을 보곤 내 머리통에 입맞추며 말했다.

"내가 이러니 일할 맛이 나지. 딸 하난 정말 잘 뒀어."

나는 그 순간이 뿌듯했다. 내 부모가 기뻐하는 것에 기뻤다. 졸립고 놀고 싶은 것은 참을 수 있었다.


계속 그렇게 순조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욕구가 계속 부모의 기대와 일치해서 늘 자랑스러운 딸로 남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최초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원래부터 엄마는 무척 엄격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다정하기보단 높은 기대를 가지고 나를 완벽하게 다듬어 세상에 내는 쪽에 집중하였다.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할 만큼 집중도가 높은 사람인만큼 그 과정은 한 톨의 예외 없이 양육에 적용됐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엄마는 아주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감정의 높낮음이 폭풍이 부는 바다 같은 사람이었고, 나는 그 파도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전전긍긍했다. 무서울 정도로 극명하게 바뀌는 파도 속에서.


오래된 축에 속하는 기억이다. 

엄마 기분이 안 좋던 어떤 날, 8살 무렵의 내가 친구들과 비 내리는 하굣길에 우산으로 장난을 치다가 빗물에 젖은 채로 현관문을 들어섰을 때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

집 안의 공기는 살기를 띄고 있었다. 아마도 할아버지와 전화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 이후 같았다. 그 당시 엄마의 기분이 밑바닥인 이유는 대부분 나의 친할아버지와의 통화로 기분을 엉망이 된 탓이었으니까. 


"우산 안 썼어?"

한창 친구들과 깔깔댄 후 들어온 나는 엄마의 살기등등한 목소리에 조금 기가 죽은 채 답했다.

"아니, 썼는데..."

엄마는 내 작은 어깨를 쥐고 외쳤다.

"어디서 거짓말을 해! 우산을 썼는데 이렇게 젖어? 거짓말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 똑바로 다시 말 안해?"

우산을 쓴 채로 집에 왔고 비에 젖은 것은 친구들과 장난을 친 탓이다. 나는 사정을 설명하고 싶어 다시 한번 입을 열어 가까스로 하굣길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필사적으로 말했다.


엄마의 눈이 번뜩거렸다. 나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옳은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잘못했어요."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 순간 엄마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것봐, 내가 거짓말일 거라고 했지? 우습니? '너도' 엄마가 우스워? 자식 거짓말도 못 알아볼 것 같아? 거짓말하면 벌받는 걸 배워야지, 이리 나와."

그리고 강한 힘으로 내 팔을 쥐더니 현관 밖으로 밀어내었다.


"너 같은 자식 필요 없어. 밖에서 살아."

눈 앞에서 현관문이 닫혔다. 순식간에 나는 비에 젖은 채로 현관문 밖에 서있었다. 그때부터 앞집 아주머니가 놀라서 나올 때까지 나는 엉엉 울며 현관문을 두들겼다. 

엄마, 엄마, 엄마. 내가 다 잘못했어요, 내쫓지 마세요, 엄마, 잘못했어요.



그 기억 이후 몇 번의 사례를 통해 점점 내게 적용되는 우리 집 제1 규칙은 이렇게 고정되었다.

<부모의 기분을 살펴라. 실제 사실은 중요치 않다. 그들의 기분이 좋은 쪽으로 옳은 답을 내놓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대부분 나 자신의 기분과 나 자신의 욕구를 따랐을 때 그랬다. 그런 선택엔 대부분 벌을 받았다.


기억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 또 있다. 

한창 집중해서 재미있는 책을 보던 중 엄마가 당장 씻으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이 책을 다 읽는데 10분 정도만 더 들이면 될 것 같아, 그 이후에 바로 샤워를 하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화가 난 발걸음으로 들어와 책을 확 빼앗더니 어른이 말하면 바로 할 것이지 건방지게 말대답을 하느냐고 말했다. 

그 날도 엄마의 심기가 좋은 날이 아니었나보다.


나는 욕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엄마는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아.

그리고 옷을 벗고 양치부터 하려다가 팔꿈치로 쳐서 양치컵을 바닥에 떨궜다. 엄청난 소리가 울렸다. 유리가 아니라 깨지지는 않았지만 욕실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는 왕왕 울려 아주 큰 소리처럼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그 순간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컵이 갑자기...." 설명하려던 내 뺨에 갑자기 어른의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 날의 충격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분노에 파들파들 떨며 힘주어 말했다.

"이 년이 어디서.... 감히.. 부모가 씻으라고 좀 했다고... 뭘 집어던지고... 확 죽여버릴까 보다. 그런 성질머리 안 죽이면 느이 친할머니처럼 되는 거야, 알아?"

"아냐, 내가 던진 게 아니라..."

그 순간 뺨이 뜨끈하게 또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한 대를 더 맞았는데 엄마의 손톱에 긁혀 턱 아래에 피가 고였다. 입을 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외쳤다.

"던진 게 아니라, 팔에 맞아서 떨어진 거란 말이야."

엄마는 그 말에 뜨끔 조차 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너도 너희 성씨 아니랄까봐 둘러대는 걸 타고났구나. 눈알 굴리는 것 봐, 거짓말하는건 절대 안된다고 했어 안했어!!"

벌거벗은 채로 몇 대인가 더 뺨을 얻어맞고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다가 나는 겨우 말했다.


"잘못했어요, 컵 던진 거요, 화가 나서 그랬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이것은 시작의 기억이다.

일화는 두 가지이지만 유년기에 나는 내쫓기거나 체벌을 당하거나 큰 소리로 성을 내는 말을 들으며 제1 규칙을 지속적으로 체득했다.


<부모의 기분을 살피자. 거스르지 말자.>


그리고 그에 더해서 나만의 규칙을 섞었다.


<나의 기분을 무시하자. 나의 욕구를 묵살하자. 사실을 말하지 말고 듣기 좋은 대답을 많이 준비하자.>


저 규칙을 스스로 잡은 것이 내가 이 에세이를 쓰게 된 이유와도 매우 밀접하다.

어른이 된 내 속에 녹아들어 어떤 중요한 것들을 결정하는 순간마다 나를 괴롭혔던 규칙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기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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