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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Aug 23. 2020

집의 규칙 2: 욕실로 도망쳐라

계속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내 심리의 시작점

* 이번 글에서는 가정 내 언어폭력을 포함한 각종 폭력과 압박, 강요 등에 대한 각종 트리거 주의가 필요한 장면이 있어 유의 부탁드립니다.




"그만둬요, 쓸데없는 짓이에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결국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어디 가려고?"

나가려는 나를, 마빈이 불러 세웠다.

"목욕탕이요. 욕조에 물 받으려고요."

덩치가 큰 마빈이 입구를 가로막자, 위압감이 느껴졌다.

"또 목욕탕으로 도망치는 거야?"


<냉정과 열정사이, 에쿠니 가오리>





또 목욕탕으로 도망치는 거야?

무척 좋아하는 책에서 저 구절을 보았을 때, 여자 주인공 아오이가 아닌데도 나는 정곡을 찔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욕실, 욕조 속은 내가 당시 도망치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하는 곳이었기에 그랬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시간은 고역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나의 자아가 커가면서 부모가 원하는 틀에서 삐져나가는 부분은 자꾸 생겨났고 그런 부분을 칼로 숭덩 잘릴 때마다 눈물이 삐죽 나도록 아팠다. 당시 나는 분재가 된 기분이었다. 최고의 결과물을 위해 뼈를 꺾고 튀어나온 자아를 잘라내고 혼을 반듯하게 다림질당하며.


그러나 나는 내가 그저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홍당무> 같은 책에서 나오는 학대나 뉴스에서 나오는 '나쁜 부모'와 나의 부모는 무척 달랐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기분에 따라 양육방식이 바뀐다고 해도 나는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고, 따뜻하게 잘 수 있는 침대가 있었으며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상도 있었다. 나는 아직 혼자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친구들도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의 상황은 표면적으론 더 나은 것처럼 보였고, 그것은 내 양육자가 노력해서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만 봐선 그랬다.


엄마의 기분이 나쁠 때 기분을 더 상하게 한 내 탓이겠지.

어린 나는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냥 기분이 나빴던 것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분명 엄마는 내 옷도 만들어주고 크리스마스라고 트리를 꾸미게 해 주며, 피자나 치킨 같은 것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런 엄마가 나를 싫어하거나 괴롭힌다고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실제로도 엄마는 나를 싫어하거나 괴롭히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자아가 본인의 이해 범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양육방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가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허덕거리는 영혼을 느낄 때가 있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옳지 않은 답변을 했을 때 가하지는 체벌 끝에도 그랬고, 진지한 나의 말에 비웃는 듯 응대하는 것에서도 그랬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의 영혼을 말라붙고 상처 입고 호흡이 가빠왔다.


욕조에 물을 받고 "나 목욕할 거야."라고 말하고 책 한 권을 챙겨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숨이 가빠오는 내 혼을 달래려면 적당하게 따뜻한 물속에 푹 잠겨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부터였다.


욕실은 약간 차가웠지만 주변은 공기가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만 간혹 내가 몸을 움직일 때들릴 뿐이었다. 책을 물에 젖지 않게 조심해서 읽다 보면 고독은 나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고독함이 필요했다. 

그 누구도 없이 고요하게 혼자만의 호흡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 누구보다 절실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욕실이 주었다. 아무리 부모가 간섭을 한대도 욕실 안까지 쳐들어오진 않았으니까. 아무리 체벌과 언어폭력 속에 말라가도 욕실로 도망치면 안전했다.


부모가 나에게 준 내 방은 온전한 고요함을 주진 못했다. 방 문을 닫고 혼자 생각에 빠져있자 하면 엄마가 방문을 왈칵 열며 외쳤다.

"답답하게 왜 문을 닫고 있어."

나는 누가 답답한 것인지 되묻지 않았다. 부당하다 여기는 것에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겁내던 시기였다. 내 언짢음보단 몸에 직접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더 아파 겁을 내던 시기였던 것이다.


문을 활짝 열고 있자면 불쾌한 냄새가 풍기듯 거실에서 부모가 티브이를 보는 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었다. 어떤 것에도 집중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억지로 책 한 장을 읽었다 하면 부모 중 누군가가 나를 힘차게 부르곤 했다.

"나와서 이거나 같이 보자!"

"책 읽을 거야."

"맨날 시답잖은 책이나 읽으면서 뭘!"

그렇게 '맨날 시답잖은 책'이나 읽는 내가 되어 내 방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보면 정말이지 속이 타들어가는 듯 고독하고 싶었다. 


모두 다 내 옆에서 사라지려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내가 혼자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할까.


이맘때 나는 공상에 빠져들었다. 아무도 없는 집을 짓는 상상을 했다. 어른이 된 내가 아무도 없는 하얀 벽의 집에서 커다란 침대를 창가에 놓고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고요함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상상했다. 연락이 올 곳도 없고 나를 부르는 사람도 없이 마냥 푹신한 침구 속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그 궤적과 그에 따른 하늘의 색깔 변화만 바라볼 것이다. 


나는 마음속에 비밀스러운 목표로 고독한 삶을 그렸다. 욕실을 확장한 것과 같은 삶이었다.


엄마는 자주 나의 영혼에 관여하며 입맛대로 고치려고 들었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조금 더 정밀하고 정교한 훈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가족 다 같이 뉴스를 보거나 할 때 내 의견을 묻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저 뉴스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어?"

"저런 건 나쁘다고 생각해."

"그래? 왜?"

"나쁜 거잖아, 어른들이 저렇게 굴지 않으면 좋겠어."

"네가 생각이 짧다. 저렇게 구는 것엔 이유가 있어. 그걸 네가 어른이 되어서 이용할 생각을 해야지, 고치라고 말하는 건 머리 나쁜 사람이나 하는 말이야."


어떤 사례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보통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느끼는 것들은 모두 부모가 느끼는 것으로 변화하고 채색되어 갔다. 가끔 발끈해서 그 말은 이상하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고 말하라고 학교에서도 가르치는데 왜 나에게 나쁜 것을 오히려 이용하라고 말하느냐,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하는 식의 반발도 했다.

그런 반발은 처음에는 설득으로 제압하고, 설득이 안 통하면 인신공격을 하고, 인신공격이 먹히지 않을 땐 마침내 체벌이 가해졌다. 체벌의 이유는 다른 것은 없었다.

"어디 좀 키워놨더니 부모한테 눈 새파랗게 뜨고 대들어, 못되어 처먹은 것."


가끔 맞고 난 이후 별도의 정신 교육이 들어가는 날도 있었다.

"다시 말해봐. 어떻게 생각해? 뭐가 맞다고 생각해?"

나는 이미 엉망진창으로 맞아서 온 얼굴이 눈물로 푹 젖어있는 상태였다. 울음을 꾹 참고 대답했다.

"엄마, 아빠가 한 말이 맞다고 생각해."

"엄마, 아빠가 한 말이 뭔데. 다시 정리해서 말해봐."

그럼 나는 정리해서 말을 했다.

"진즉에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지. 어른이 말하면 그냥 받아들이란 말이야, 네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부모인데, 부모가 너 잘못되라고 이러겠니?"

그렇게 마무리 멘트가 나오면 그 날의 정신교육은 다행스럽게 끝이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얼굴 씻고 네 방으로 꺼져서 공부나 하라고 윽박을 지를 테니 그럴 때 얼른 일어나 방으로 가면 될 일이니까.


그런데 어떤 순간은 엄마가 분이 안 풀린 듯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는 날도 있었다.

"아니야, 쟤 눈을 봐. 쟤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부모한테 눈 굴려가면서 듣기 좋은 말로 꾸며내는 거야. 하나도 받아들이진 않았잖아. 다시 물어봐, 다시. 진심으로 받아들였냐고 물어봐야 돼."


그런 날은 정신 교육이 2시간 넘게 이어지기도 했다. 

A라고 생각해, B라고 생각해? A라고? 너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구나.. 우리 딸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해졌지? 아니, 지금은 B라고? 아니지, 네가 A라고 이미 말을 했잖니. 이젠 거짓말도 하는 거야? 너 정말 많이 혼나야겠다 오늘.


아아, 참아, 절대 소리 지르면 안 돼.

소리를 지르거나 울며 발을 쿵쿵 구르거나 이 식탁에 놓여있는 모든 것을 와장창 바닥으로 내던지고 싶지만 참아야 해. 참지 않으면 더 심한 짓을 당하게 될 거야. 그냥, 상상하자. 상상하는 거야. 먼 미래를.


욕실로 도망가서 물 안에 가라앉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간을 길게 늘인 것 같은 그 시간이 분명 올 거야. 누구도 나를 위협하지 않고 눈치 보게 만들지 않고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대로 온갖 공간을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올 거야. 


나는 어른이 될 테니까.

지금은 아이라서 어떻게든 붙어서 생존해야 하지만, 나는 어른이 될 거니까.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도망을 친다는 것은 내 삶에 아주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도망친다는 감각을 떠올린다. 무언가 위협이 되거나 두렵거나 감당하기 싫거나 지금이 괴로울 때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도망친다는 상상을 하면 제일 먼저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는 욕실의 욕조가 떠오르는 것이다.



내 부모는 내게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키워주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도망치지 않고 현실과 마주하며 극복해나가서 실재하는 행복을 쟁취하는 에너지이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사는 방법은 모른다. 그래서 늘 도망치고 싶다고 외치는 내면의 입을 틀어막은 채 어른인 척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키워지지 않은 것을 스스로 키워보기 위해 두려움을 뛰어넘어 보자고 마음먹는다.

내게 행복한 선택이 무엇인가, 타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타협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따져보는 것이다. 



우선은 그것부터 시작일 것이라 믿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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