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간 서른군데가 넘는 상담센터, 정신과를 갔다. 그중 가장 최근에 만난 예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심리학적 흑역사들이 많지만 생략한다.
상담사와 의사는 하는 일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인물을 교차로 만나곤 한다. 심리상담사는 의학적인 상황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정신과는 의사에 따라 상담을 심도 있게 진행하지 않는 의사도 있다는, 약간의 딜레마가 있다. 이것을 둘 다 적절히 갖춘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의사 선생님만을 다루려고 한다.
2018년. 모든 것이 힘들었다. 지금도 조금씩 벗어나는 중이기는 하지만 그때 망가진 마음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내가 열심히 살아서 다 불태웠기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다녔다. 젊었던 시절을 추억하는 남편에게도 "지금이 중요해!"라고 충고질을 하던 나다. 그 말도 얼마나 허세였는지 2018년에 깨달았다. 삼재였는지, 기가 약했는지 등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정도로 지난 3년은 모든 장면에서 절대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인내와 수양의 시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죽지 않고 살아난 내가 참으로 장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엉망이었던 시절이었다. 향정신성 약물이 엉터리로 처방되어버린 까닭에 나는 엄청난 식욕, 음주, 소화가 되지 않아서 탄산과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공황장애라고 표현하는 그 증상을 온몸으로 약 부작용과 함께 겪어내 온전한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 선생님'을 만날 당시의 나는 그런 상태였다. 나를 스트레스받게 하는 요인은 가족관계, 일련의 사건사고. 그리고 학교였다. 나는 진료실 문을 열자마자 눈물을 쏟으며 책상 위로 쏟아졌고, 예선생님은 두서없는 내 말을 차분히 들어주셨다. 예 선생님은 불필요한 리액션을 하지 않았다. 말이 끝날때까지 메모하셨다. 그 후에야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다. 진료실을 나와 차 안에서 펑펑 울면서 메모했던 글을 정리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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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분이 진짜 원했던 건 어머니를 보내드린 선생님의 안정과 일상으로의 안전한 복귀 아니었을까 합니다. 기본적으로 잘 챙겨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신다고 했던 남편분의 행동으로 지금을 유추해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어요.(남편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싫어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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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형성된 관계성은 변하지 않아요. 내가 노력해도. 안 해도 같은 반응일 겁니다. 이럴 때는 선생님이 행복할 선택을 하는 거예요. 나 위주의 선택을 이기적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과는 거리를 둬도 괜찮습니다. 정말 선생님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선생님의 선택을 강요하지도. 판단하지도 않아요. 다행히 그런 분이 옆에 있으시죠?(노력해도 안 되는 이들에게 노력하고 좌절하고 기대하고 좌절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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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가장 어려운 것은 내 가족이 누구이냐입니다. 억지로 분리할 필요가 없어요. 중요한 순간에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을 선택하는 습관을 들이면 돼요.(할말하않.. 말하면 다시 숨이 막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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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은 돈이 오가는 관계예요. 이해관계요. 이해로 얽힐 소지가 없다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요. 선생님한테 월급 주는 사람이 교장선생님이 아니잖아요. 국민 세금이지요(천안에서 온 거 티 내냐고 이유 없이 꽤 오랜 시간 갈굼 당하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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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선생님의 부부사이가 참 바람직하다고 봐요. 누구나 안 맞거든요. 그런데 맞춰가려고 하다 싸움 나요. 선생님 부부는 많은 상담과 치료와 대화를 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서로의 다름을 알고 그 자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분명 생겼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뭐 때문에 어떤 대화를 했던 것인지는 기억 안 나지만 남편과 사소한 언쟁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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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가능성이 있으면 정신과 약은 아무것도 안돼요. 절대 안 됩니다.(혹시 모를 둘째 임신 가능성이 있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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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수를 다시 하면 어쩌나 걱정하면 그 실수를 안 합니다.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고 반성을 안 해야 또 실수를 해요. 선생님이 다시 장거리 운전을 해도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빠르게 안정이 될 겁니다(장거리 출퇴근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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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정말 많이 줄이셨어요. 그래도 마지막 6개월은 이 약을 처방해드릴게요. 병원 옮기셔도 이 약을 한알 드시고 괜찮으면 반알 드세요. 생리 전 증후군에도 도움이 돼요. 안정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을 잡아줄 겁니다. 잘하고 계시고요 잘 지내실 겁니다.(이사 전 마지막 진료 때)
이런 식의 예 선생님의 정제된 한마디는 매 치료 때마다 나에게 광명을 가져다주었다.
예 선생님은 시골 작은 종합(?) 병원에 드물게 자리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였다. 따로 예약을 받지 않았다. 오는 순서대로 천천히 상담해주셨다. 길게 말하면 말하는 대로 약만 받아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주셨다. 알고 봤더니 상담시간이 길어지면 진료비가 많이 나오는 시스템.
예 선생님은 내가 만난 정신과 전문의중 나에게는 뛰어난 의사다. 가장 전문적인 상담 자질을 갖춘, 의약품에 대한 작용 부작용을 정확히 설명해주되 상비약을 챙겨주며 스스로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손에 꼽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