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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 Jan 28. 2021

엄마 안녕 #003

아빠는 위암 수술을 받았어



아빠가 위암 수술을 하셨다. 일주일 되었다. 다음 주에는 개인적인 일들 때문에 쭉 머무를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남편도 내가 방학일 때 찾아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드리고 오라면서 갈길을 재촉했다. 코로나 방역수칙 잘 지키고 위생 철저히 하며 친정에 왔음을 밝힌다.

암세포는 갑자기 찾아왔다. 2019년 하반기 건강검진 때는 전혀 없었던 암세포가 2020년 건강검진 때 조기 발견된 것이다. 아빠는 늦지 않게 무사히 수술을 마치셨다. 위암 수술을 오천 번 넘게 하신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다. 아빠는 괜찮다고 걱정 말고 니들이나 잘 살면 된다고 얘기하시지만 나는 안다. 아프면 아무것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발가락만 다쳐도 세상이 내편이 아닌 것 같은 좌절감을 느끼는데. 암수술이 괜찮을 리가.

1년 전 이맘때는 엄마가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있으실 때였다. 아빠는 너무나 많이 울었고 거의 못 주무셨고 갑자기 이별해야 했다. 배우자로서 엄마와의 이별을 직면해야 함이 정말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또 자식들 앞에서 괜찮은 척하셔야 했다. 늘 괜찮다 하셨다. 원래 자신의 감정표현에 늘 서툰 할저씨다. 그러한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누적되셨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애틋하게 글을 쓰지만 현실은 안 그렇다. 우리가 살가운 부녀사이는 아니다. 나는 엄마아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딸이라고 부모님 모두 말한 적이 있다. 아빠와 둘이 있으면 할 말이 많지 않다. 해봤자 쌀은 있냐. 꼬마는 어디 유치원 가니. 너는. 사위는 어디로 발령 나니 등. 어른들의 오리지널 질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여러 가지로 내가 상처 받은 것이 많아 하여튼 데면데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요즘 내가 풍년 압력솥 덕후가 되지 않았는가? 친정집에 압력솥이 있다길래 그 솥으로 찹쌀죽을 끓여보고 싶었다. 내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 거다. 내가 요리에 크게 소질이 없다는 것을. 내 요리의 고객님은 남편과 딸. 둘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죽 한 그릇 해드리고 싶었다.

서른여덟 되도록 몸이 아픈 부모에게 음식을 해드린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도 그러지 못한 게 아픔으로 남았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해보고 싶어 찾아왔다. 물론 동생들이 잘하고 있다. 더 살갑게 잘해주고 돈도 잘 벌어서 아빠에게 필요한 것을 신속하게 지원한다. 그러든 말든 나도 내 나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실은 아빠 수술 전날에 이 소식들을 들었다. 이사하고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정신없었을까 봐 검사받고 수술 날 기다리는 동안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았던 거다. 소식을 들은 밤, 엄청 울었다.


모든 자식들이 같은 마음일 거다. 자식으로서 밀려오는 슬픔 때문인 것 같다. 엄마가 쓰러지고는 황망함에 울지도 못했다. 그렇게 칠십일을 보내고 보내드려야만 했던 때보다는 나아서였을까. 울기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도 초기에 수술을 잘 마치고 잘 이겨내는 아빠를 봐서 다행이다.

아빠는 죽을 드실 수 있다. 사과를 오십 번쯤 씹어 삼킬 수 있다. 잠시 나의 안부를 어색하게 묻다가 집 앞에 잠시 나갔다가 택시 시동을 걸어볼 정도는 된다. 통증이 있어서 센 진통제를 처방받아야 주무실 수 있고. 쉽게 피로해져서 당분간 자주 주무셔야 한다.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관리해야 하는 삶이 남았다.

감사한 것이 있다. 아빠의 형제자매 4분이 안부를 물어온다. 팔십칠 세의 할머니가 하루 세 번 전화를 걸어 아내가 없는 예순 네 살 아들의 안부를 묻는다. 아빠의 40년 지기 친구들이 병원행을 돕고 흑마늘을 만들어온다. 아빠가 막 친절한 스타일은 절대 아닌 것 같은데 주변에 늘 사람들이 많다. 친구가 적은 나는 아빠의 인복이 부럽다.

아빠를 돕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안 해도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 내가 내 자리를 애써 어필할 필요도, 어정쩡하게 있을 필요도 없다. 나도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정도만큼은 하려고 한다. 아빠도 주변 챙기느라 못 돌봤던 아빠의 온전한 삶을 돌보고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엄마도 그걸 바랄 거다. 그리고 나도 바란다.

아빠. 건강하게 늙어줘. 사랑해.

fin.


매일 엄마 등에 업혀 울고 또 울었을 삼십팔 년 전의 참으로 키우기 어려웠을 딸내미. 이 딸이 첫돌이었을 때 이 아이의 아빠는 스물여덟이었다고 한다. 부모의 청춘으로 사 남매가 자랄 수 있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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