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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Feb 14. 2021

기억이 났어 #002

엄마와 내가 함께 좋아하는 유일한 음식, 미역국


아침부터 졸린 눈을 비비면서 들깨를 볶았다.


사실 머리털 나고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춘천 어머니께서 검은 봉지에 가득 담아주셨다. 부피가 꽤 되었고, 카레 만드는 냄비에 가득 들어갔다. 들깨를 살짝 데우기 정도만 하라는 어머님 말씀을 기억하며 연기가 솔솔 올라올 때쯤 가스불을 껐다. 그리고 믹서기를 한참 찾았다. 이사할 때 이모님이 어디에 두셨는지 몰라 여기저기 열어보다가 보온병이 들어있는 어느 수납장에서 찾았다.


리고 들깨를 사정없이 갈았다. 너무 갈아대니까 진흙처럼 뭉쳐지기 시작하길래 냅다 그만두었다. 차곡차곡 밀폐용기에 담아서 냉동실에 넣었다. 용기 세 개가 가득 찼다.


그리고 냉장고에 남아있던 나의 오랜 숙제. 엄마가 작년에 주었던 들깨. 그것도 갈아야 하는 것이었는데 나의 우주 최강급 귀차니즘 때문에 갈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갈았다. 들깨 미역국을 워낙 좋아하는 나를 위해 엄마가 볶아다 준 것이었는데. 여하튼, 오늘에야 갈았다.


요즘 내가 마음이 넉넉하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할부가 천지삐까리로 쌓여있음). 바로 큰 이모가 보내주신 미역도 천지삐까리로 쌓여있기 때문이다. 미역을 정말 좋아하는 나로서는 요즘 반찬 걱정이 없다. 간장에 미역만 넣어서 끓여먹어도 하루 종일 먹을 수 있다. 미역국을 정말 좋아하게 된 계기는 잘 모른다. 엄마가 자주 해 주니까 자주 먹고,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미역국을 먹어보고, 커서도 미역국이 쉬우니까 끓여먹고 했던 거다.


내가 최고로 꼽는 미역국은 역시 외할머니표 미역국. 가마솥에 소고기 열 근을 넣고 삼일 정도를 계속 불 때면서 끓이는 국. 미역도 그냥 미역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외갓집이 당진 삽교천인데, 지역특성상, 그리고 할머니 성격상 정말 좋은 재료만 넣어서 끓인 것 같다. 명절 때 사람이 잔뜩 있는 그 북새통에서 미역국만은 사수하겠다며 모두가 모여 앉아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밥에 말아서 간장게장이랑 같이 먹어도 맛있고 잡채랑 같이 먹어도 꿀맛. 소고기를 아무리 넣고 우려 봐도, 나는 그렇게 되지 않더라.


그다음으로 꼽는 미역국은, 엄마랑 먹는 미역국이었다. 어릴 적에 미역국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밥상에 올라왔다. 왜 그런가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냥 엄마가 좋아했고, 내가 좋아했다. 아빠는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의 국물만 맛보는 정도였고(아빠는 김치찌개파), 동생들은 취향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나와 엄마는 아무 미역국이나 다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생일이면 소고기가 들어가고, 아무 날도 아니면 주로 들기름과 간장이 들어간 깔끔한 맛의 미역국이었다. 그것과 김치면 나는 밥 한 공기를 다 먹을 수 있었다. 가끔 막내 외삼촌이 미역국을 작은 냄비에 담아서 너구리를 끓여먹는 괴식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나도 커서 그렇게 끓여먹어 보니까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 그걸 먹는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던 엄마의 표정이 생각난다.


리고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돌아가실 때까지는 소금이 완전히 빠진 음식을 드셔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미역국은 꾸준히 등장했다. 간이 하나도 안된 소고기 미역국에 소금을 넣어서 알아서 간을 맞춰 먹었다.


끝으로, 엄마가 자주 해주던 건 아니었지만 참치가 들어갔던 미역국이 있었다. 참치 국물까지 들어갔었는데 그것도 정말 맛있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봤었던 바지락이 들어간 미역국. 거기에 껍질 볶은 들깨 한 스푼.


그 모든 미역국의 맛을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춘천 어머님께서 주신 들깻가루로! 미역국을 두 정 씨에게 대접하였다. 육수가 사골이었다면 더 맛있었겠다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역시 들깨 미역국은 들깨가 술이 들깨도록 잔뜩 들어가기만 해도 그걸로 완성. 껍질을 까지 않은 들깻가루도 한참을 끓이니 뽀얗게 우러났다. 미역도 내 스타일대로 푹 퍼지도록 한참을 끓였다. 그리고 국간장을 조금 넣었다. 그리고 또 미역이 더 퍼지게 한참 끓였다.


우리 남편은

"아우, 말해 뭐해"

하면서 엄지를 치켜들었고, 우리 꼬마는

 "저녁에 미역국이 없어지는 거 아니지? 또 먹을 수 있지?" 

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그럼. 집에 미역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우리가 먹고 싶을 때 언제든 먹을 수 있어." 

이렇게 말하니 꼬마는 날아갈 듯 기뻐했다.


아무래도 외할머니의 미역국이 엄마의 미역국이 되고, 엄마의 미역국이 나의 미역국이 되어 꼬마에게 전달되지 않았는가 싶다.


그래서, 내일도 들깨 미역국을 먹을 참이다. 내일은 미역이 더 푹 퍼지고 국물이 더 진해져서 맛있을 것 같다. 이렇게 외할머니 생각도 하고, 엄마 생각도 하고, 들깨를 주신 우리 시어머니 생각도 한다.


내일, 미역국 한 사발씩들 어떠심? 들깻가루에는 오메가 쓰리가 많아서 고지혈증을 예방하고...(마이크 꺼짐)


fin.


그러고 보니 어젯밤 꿈에 외할머니가 평소 복장대로 나오셔서 우리 집을 한 바퀴 휘 둘러보시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외할머니가 나오면 좋은 징조인데. 뭔가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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