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이민 이야기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한국을 떠났던 건 어린 나를 대신해 부모님이 결정을 내려주었던 첫 번째 이민이었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민을 반대할만한 상황 인식이나 다른 이유도 없었다. 캐나다라는 나라가 있고, 거기에 가서 온 가족이 살아본다고 하니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한국을 떠나면서 이 나라에 버리고 싶었던 기억들을 두고 훌-쩍 떠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적응'이라던가 '출발'이라는 점에서 이민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저 한국에서 살아가는 친척들, 특히 자기 자식을 먼 나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 엄마의 부모님과 아빠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도 시큰거렸다. 이별이 뭔지, 가족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슬퍼하는 그들을 떠올리면 내 입술도 삐쭉거렸다. 잠시였지만 광주에서 큰 정을 나누었던 중학교 친구들과도 섭섭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공항으로 가는 길, 비행기에 자리를 잡은 일 등이 기억 속에 뿌옇게 남아있다.
10대 때 모든 것이 생소한 이국에서 새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속이 타들어가는 일인지 몰랐으나 더 나은 방법이랄 것도 없었다. 매일 벽에 부딪히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벽에 부딪혔다. 홀로 힘을 내어 벽을 향해 달려야 했다. 다들 무성의하게 한 손을 들고 'Hi' 하던데, 나는 그렇게도 고개가 숙여지고 말더라. (안녕하세.... hi...)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며 'Hi'라고 읊조릴 때면 상대방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후였다. 인사 하나를 제대로 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영어권의 나라로 이민을 와 살면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새로운 언어에 적응을 했다고 볼 수 있는지 묻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우리 막내처럼 5살에 유치원(Kindergarten)부터 시작해서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고, 40대 중반에 스시 가게부터 시작해서 기본적인 회화 말고는 소통이 어려운 것도 아니라서 뭐라 답하기가 애매했다. 이미 흐려진 기억을 뒤져보자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내게는 차를 타고 길가를 지나면서 스치는 간판들이 문자로 보이기 시작한 때가 적응기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적응을 했다. '집'이라 부르면서도 '집'이라고 인지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계속 발을 붙이고 살았더라도 완벽하게 익숙해지기는 어려웠을 텐데 나는 사이사이 이 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대학은 미국 동부에서 다녔고, 최근 3년 반은 한국에서 대학원 생활을 했으니 말이다. 중고등학교(Secondary school)를 함께 다닌 친구들 중 몇몇이 밴쿠버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나는 정착이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조금씩 피부로 와 닿았다. 곧, 나에게 선택을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어쩌면, 두 번째로 이민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
논문을 제출한 후 졸업식에 대한 소문들(대면이다, 비대면이다 등등)이 무성할 때쯤 나는 캐나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나와 같은 인간 중 누구도 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준비된 직장(교회나 선교단체와 같은 비영리 기관), 목 빠지게 날 기다리고 있는 연인(있었으면 좋았겠다...) 같은 건 없었다. 4년 전에 대충 정리해둔 짐들과 동생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큰방이 날 맞이할 전부였다.
떠돌이처럼 살았기 때문에 지난 몇 년의 생활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간다고 했을 때 몇몇은 당황했다. 내가 캐나다를 '집'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색해했다. 당연했다. 집을 집처럼 대우하지도 않았으면서 이제와 집이라니. 그러다 보니 짐을 싸면서, 다시 들고 갈 필요가 없는 물건들을 버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두 번째 이민을 떠나는구나.
누구누구에게 연락하여 어떤 인사말을 건네야 할는지 머리가 복잡하더라니,
뭘 버리고 뭘 챙겨 가야 할지 헷갈리더라니,
언제로 비행기를 예약하는 게 적당한 건지 모든 게 어렵기만 하더라니...
이건 '이민'을 떠나는 '어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감사한 마음에 자주 죄송스럽기까지 한 어른분들께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지난 시간 동안 감사했노라고, 앞으로 캐나다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보겠다고. 아쉽지만 따뜻한 응원을 받았다. 큰 의미는 없지만 오래 싸들고 다닌 짐들과도 작별했다. 공식적인 학교 스케줄이 끝난 그다음 주중으로 티켓을 발권했다. 마지막 식사 약속을 위해 필요한 며칠을 포함한 적당한 시간이었다.
캐나다에 살면서 어른이 된 이후에 이민을 결정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성인이 되어 타지로 떠나는 이들을 ATCK (Adult Third Culture Kid)라고 칭한다. 영어가 어렵고, 공부도 어렵고, 취직은 더 어렵다 했던 그들의 푸념이 기억난다. ATCK로 살아간다는 건 대단한 도전이다. 나의 경우, 가족들이 이미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나도 청소년기를 보내고 직장생활까지 했던 곳이라서 완전히 낯설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야 이 곳에서 나의 삶을 개척해보겠다고 떠나는 마음이야 무겁지만, 이 무거움에 비하면 그들이 체감해야 했던 두 번째 삶은 얼마나 더 무거웠을까.
캐나다는 여전히 쾌청하다. 하늘도 구름도 산도 물도 그대로이다. 해가 빨리 져서 하루가 짧은 것 같은 겨울이 지나자 하루 종일 낮인 것처럼 날도 밝고 공기도 맑은 봄이 왔다.
2월 초에 9주의 계약직 알바를 시작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김그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필름 쪽 일이었다.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뭔가 나가서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에 뛰쳐나갔더니 이런 일도 얻어걸리더라. 알바를 하던 도중에 최근 전공을 살려 청소년들을 돕는 비영리 기독단체인 영 라이프 캐나다(Young Life Canada)에 정규직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계약직이 끝난 날에 새로운 직장의 계약서가 도착했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번 4월은 4년 전 내가 옛 직장을 그만둔 달이기도 하다.
다시 떠올려본다. 모든 게 평범하고 모든 게 평온한데 마음은 평범하지도 평온하지도 않았던 2017년의 나. 작은 집을 하나 살까 싶어 모기지 중개인을 만나러 가보기도 하고, 만나던 사람과의 미래도 꿈꿔봤지만, 결국엔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이렇게 늙어가도 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당시의 내가 서울에 가면서 두 손안에 쥐고 갔던 몇 가지의 기도 제목들이 전부다 지금 내 안에, 나의 앞에 다양한 모습으로 응답되어 있다.
앞으로 가야 할 길 위에 어떠한 일들이 펼쳐질지 전부 다 알 수는 없다. 그게 인생이기도 하다. 하지만 4년의 부재 동안 나는 내가 떠났던 첫 번째 이민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TCK(Third Culture Kid)로서의 시작. 두 문화권 사이에 샌드위치 속 햄처럼 껴서 더 수용하고 더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투쟁과 갈등, 어려움을 통해 지금의 내가 되었다. 좀 더 예민하게 나의 삶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의문이 들 때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질문했고 또 질문했었다.
4년의 부재를 마친 후 다시 이곳으로 이민을 떠나오면서, 나는 내 두 번째 이민의 방향을 안다. 여러 학교들과 교회, 그리고 많은 다민족들이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지역 공동체. 이곳에서 나는 나와 같은 TCK 청소년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시절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다른 이의 일상 속에서 보게 될 때마다 나의 첫 번째 이민을 떠올리게 되겠지.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 새로운 시작을 권하려 하겠지. 이 일이 내가 두 번째 이민을 떠나온 목적이자, 방향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세상 어디에 진정한 평안이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나라는 존재 그 자체로서 온전히 이해받고 사랑받는 '집'. 나 또한 이러한 '집'을 얼마나 간곡하게 원했었던가.
다음 직장생활을 기다리는 중에 거리에서 많은 청소년들을 본다. 이들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이들의 마음은 편안할까. 마지막으로 아무런 걱정, 고민, 염려 없이 쉬어본 적이 언제일까.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 옮겨온 백성 혹은 백성을 옮기어 살게 하는 것이 '이민'의 사전 속 정의이다. 나 한 사람이 한국생활을 마무리하고 밴쿠버로 떠나온 결정이 내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번 두 번째 이민이 나에게는 나의 소속,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나의 미래를 반증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달라진 것이 하나 없다. 내가 살아가게 될 버나비(Burnaby)라는 도시는 고층 아파트가 몇 채 더 세워진 것을 제외하면 내가 떠나기 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나이가 좀 더 먹었을 뿐, 체형과 성향 및 성격까지 달라진 것이 크지 않다. 무엇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지만 바뀌었을 뿐이다.
무엇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지만 바뀌었는데 전부가 바뀐 셈이다.
나의 일상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건, 즉 나의 소속, 나의 정체성, 게다가 나의 미래까지 다 바뀌었다는 말이니까.
이민가방, 여행가방을 주렁주렁 달고 밴쿠버로 입국하던 12월 10일에는 몰랐다. 두 번째 이민이구나, 이번 이사는 나의 의지 100%가 담긴 온전한 나만의 선택이구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나의 두 번째 이민은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집에 돌아오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거였다.
하나님의 백성인 나 한 사람이 이제야 내가 소속된 그의 나라의 백성답게 옮기워져 살게 된 것.
나의 두 번째 이민이 뜻하는 바는 바로 이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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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image by Ross Parmly
Caption images by Hermes Rivera, Yoona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