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쓰기 리스트
07 공감할 때 생기는 힘
10 하나만 선택할 용기
11 동시에 여러 가지를 잘 해내는 방법이 무어냐 물으신다면
15 이런 글 써보려고요
16 그들이 말하는 글쓰기
17 너는 네가 하는 말이다 [말 그릇 리뷰 Part. 1]
18 네 말 그릇엔 무엇이 담겼는지 [말 그릇 리뷰 Part.2]
19 행복이라는 상태
21 그들이 말하는 두려움
22 커뮤니티 빌딩의 준비물
23 10대의 이민에 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8가지
10대의 이민은 대부분 타인의 의지로 결정된다. 나라 전체가 전쟁이나 기근과 같은 위기에 빠져 다른 나라로 난민 신청해야 하는 경우 외에, 새로운 기회와 삶의 방식을 위해 이민을 선택하는 경우, 어린 나이의 청소년들은 그들의 부모님의 의사에 따라 모국을 떠나 새문화, 새 언어의 장벽 앞에 세워지게 된다. 간혹 자신의 의지로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학벌을 위해 유학을 오는 경우도 있다.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건, 10대에 새로운 나라에 정착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온전한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해외에 나가서 무조건 부딪혀보자고 다짐하는 어른들과는 다른 차원의 노력과 고통이 따른다는 뜻이다.
어릴 적엔 친구가 최고였다. 엄마 다음으로는 늘 친구가 우선순위였던 십 대 시절, 비행기를 타고 10시간을 가야 하는 캐나다로 ‘이사’를 가면서도 죽마고우들과는 죽을 때까지 친한 사이로, 꾸준히 연락하는 사이로 남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처음엔 잦은 이메일로, 가끔은 비싼 국제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그러면서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진행되는 수업에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오랜 친구들도 자신들의 삶이 있었다. 중간고사가 있고, 방학이 있었다. 그렇게 이메일 속 편지의 내용은 줄어들고, 우리의 목소리는 잊혀 갔다.
싸이월드로 한번 연결되고, 또 페이스북으로 다시 연결되어온 친구들과의 추억. 하지만 너무 오랜 기간 함께 한 기억 없이, 나눈 대화 없이 이제는 몇 년에 한 번도 볼까 말까 한 오래 ’전’ 친구사이가 되어버렸다. 물론, 언제든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금세 과거로 돌아간듯한 느낌이다. 오래되었지만 새롭고,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느낌. 처음 호언장담했던 우정은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야만 지켜지는 것이었다. 하루라도 빼먹고 물을 주지 않으면 금세 말라비틀어져버리는 연약한 식물과도 같은 것.
나의 의견을 소통해야 하는 자리에 놓이면 늘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한다.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선택과 캐내디언으로서의 나의 선택. ‘동거’와 ‘결혼'과 같은 현대 젊은이들의 삶과 깊이 관련된 주제들이나, ‘정치’와 ‘종교’와 같은 사회 이슈에 관한 나의 생각들은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었으면 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이가 들면, 어른이 되면 생각이 정돈되고 답이 하나로 정리될 줄 알았다. 확실한 결론을 가진 사이다 같은 사람, 이면 편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어린 시절 보고 듣고 배워온 사상과 가치를 지니고 있고, 캐나다 이민자로 자라면서 습득하고 동의한 새로운 지식과 의견 또한 가지고 있다. 두 지역에서 얻어낸 이것들은 나를 만나 많이 융화되었다. 하지만, 세상 많은 것들이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듯, 내 안에서도 아직 하모니를 이루지 못한, 극과 극의 목소리들이 부딪히곤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생각의 결론을 내려야 할 때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묻게 된다. 한국인인지, 캐나다인인지. 아니면, 한국인 몇 프로, 캐나다인 몇 프로인지 숫자 놀이도 해본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계속 궁금해져만 간다. (이제는 편하게 한국계 캐나다 이민자,라고 단정 짓는 때가 많아진다.)
아주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때 살았던 시골에서 동네 친구들에게 질투와 야유,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었다. 나름 동네에서는 많이 예뻐해 주시는 '보건소 집 큰딸'이라는 타이틀 때문이기도 했고, 자꾸만 선생님이 권력을 쥐어주셔서 쉬는 시간마다 떠드는 애들 이름을 칠판에 거짓 없이 적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캐나다에는 한 친구만을 고립시키는 ‘왕따’ 문화 같은 거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앞서 걷는 내 등을 자꾸만 밀던 서너 명의 백인 아이들.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나는 운동장이 떠나가라 한국말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 번만 더 밀면 너희들 다 죽여버릴 거야!라고.
어른이 돼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회사 내에서 누군가를 괴롭히고, 미워하고, 고자질하는 무뇌충들은 없을 거라 짐작했던 모양이다. 본인도 이민자이면서 같은 이민자에게 인종차별, 대놓고 성차별, 은근히 괴롭히는 맘 상한 사람들은 어딜 가나 빠짐없이 있어준다는 인생의 또 다른 진리를 나는 직접 체험한 후에야 깨달았다.
새로 이민을 온, 혹은 이민을 계획 중인 사람들에게 듣는 질문 중 절대 빠지지 않는 하나는 영어를 배우는데 얼마나 걸리냐, 라는 질문이다. 사람마다, 영어를 공부한 기간별로 다 다르겠지만, 헬로우와 굿바이만을 알았던 14살의 나는 3개월이 지나서 겨우 간판에 쓰인 글씨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6개월이 지나서 햄버거집 메뉴판을 보며 주문을 할 수 있었고, 1년이 지나니 수업 중에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게 된 건 솔직히 3년이 훨씬 지나서였던 것 같다.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좋은 예는 될 수 없다. 하지만, 무조건, 언어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분야이다. 의미뿐만 아니라 맥락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간혹 이민자나 유학생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나 또한 처음엔 대학을 한국으로 진학하고 싶어서 서울에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했다. 그때에는 한국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한다는 것이 어려운 선택처럼 느껴졌다. 큰 마음먹고, 짐 다 싸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들어선 이민생활인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생활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한국에 들어와서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걱정했던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 과민하게 염려했던 것이라는 걸 지금은 안다.
다른 나라에서의 생활을 결심하고 떠나왔지만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경우,
새로운 시작을 위해 큰 결심을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전의 삶이 나와 더 잘 맞다는 걸 알게 된 경우,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뭐든지 시도해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민생활은 부모님들에게도 큰 변화를 의미했다. 요즈음, 각자의 휴가 때마다 한국에 들어와 가족들을 만나는 우리 부모님은 여행하는 중에도 캐나다를 그리워하신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민 초기에는 한국어와 한국문화, 한국적인 사고방식과 한국의 기억들이 우리 부모님의 인생의 대부분은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우리 남매보다 많은 것들을 어려워하셨다. 오랜 시간, 해외를 집으로 여기며 살아오시다 보니, 이제야 캐나다의 생활방식과 이 곳의 분위기가 그들의 삶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10대의 이민과 40대의 이민은 속도가 다르지만, 분명 비슷한 변화를 겪는다. 그러는 동안, 각자의 고민과 어려움, 아픔이 깊어지고 짙어진다. 부모님은 새 둥지에서 빨리 자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시고, 자식들은 학교생활, 친구관계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 발버둥을 친다. 분주하다는 핑계로 대화가 뜸해지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내가다 보면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문화적 이해와 세대 간 소통이 부재하게 된다.
아직도 부모님과 우리 남매는 서로에 대해 많이 배워가는 중이다. 내가 10대일 적부터 20대를 지날 때까지 부모님은 일을 하시느라 너무 바쁘셨고,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지냈다. 나이가 이 정도 먹고 보니, 가족을 위해 모든 젊음이라는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으신 부모님의 고충을 떠올려 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날 며칠 밤새웠을 그들의 노력과 고민과 질문들. 그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나는 우리의 차이가 당연하다는 것과 이러한 차이를 좁히기 위해 우리가 늘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캐나다로 떠나고 나서도 가끔씩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가족을 만난다던가, 교회 행사에 참석한다던가, 휴학을 하고 취직을 한다던가 할 때 몇 차례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분명히 내가 태어나고 자란 땅인데도, 함께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거리를 뛰놀던 친구들인데도 어색하고 불편하고 다르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나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지금도 세계 수준급의 편리함으로 굴러가는 한국의 시스템에 놀랄 때가 많다. 편의성에는 늘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낯을 붉히는 점들도 있다. 버스표를 끊으려고 터미널에 줄을 섰을 때나 ATM 기기를 이용하려고 은행에 줄을 섰을 때, 등 뒤에 바짝 붙어 내 귓가에 대고 거친 숨을 내쉬어주시는 분들을 만나거나 사람이 많은 지하철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 몸에 손을 대고 나를 동서남북 원하는 방향으로 밀치시는 어르신들을 마주할 때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기도 한다.
캐나다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행동이 달라서 서울에서 지내면서도 내가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매번 느낀다. 그렇다고 내가 저 반대쪽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저 나는 두 곳에 소속된, 두 곳에서 많은 것을 배운, 두 곳에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밴쿠버 국제공항에 도착하면 아, 집에 왔구나,라고 느끼게 된 지 이제 고작 5년 정도 되었다. 대학을 미국으로 가면서 캐나다와 미국을 번갈아 가며 생활해왔기 때문에 어디가 집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길고 긴 휴학 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했고, 다시 공부를 하다가 대학을 마칠 때쯤 캐나다가 '집'이구나, 라는 느낌을 감지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곳, 나를 잘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는 곳, 마음이 편안해지고 풍족해지는 그곳이 나의 집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그곳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14살이 되어서 도착한 곳, 나의 첫 번째 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는 곳, 많은 사람들이 나의 모습과는 참 다르게 생긴 곳이다. 소수 민족, 외국민, 이민자, TCK, 1.5세 등의 이름이 내 생활에 따라온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러한 명칭들이 힘겹지 않다. 나를 설명하는 수많은 닉네임들이 다 나의 것이 되어준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나를 제외하고도 숱한 사람들이 이방인, 이민자, TCK로 살아왔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가치 있는 많은 일들을 해주었고, 지금도 해주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책임을 다하는 또 다른 한 명의 '외국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멀지 않은 미래에 집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캐나다에 완벽하게 속하지 못한 캐네디언으로 살아가겠지만,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나에게는 나의 관점을 만들어준 경험이 있고, 모든 경험은 나를 도약하게 하는 플랫폼이 되어줄 것이니까.
나의 아픔을 타인의 아픔과 비교할 수는 없다. 비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만큼 힘들었는데, 당신의 괴로움은 것보다는 수월하지 않았느냐고 말하지 않는다. 농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국내외에서 이민이나 유학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삶의 다양한 시기에 변화를 도모하고 시작을 꾸려본 사람이라면, 이 8가지 사실에 동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민을 앞둔 가장이거나,
유학을 고려중인 학생이거나,
해외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이거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돈을 모으고 있는 예비 워홀러라면,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이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어려움도 극복 가능하지만 언제든 다시 집으로 돌아와도 괜찮고,
어디를 가든 외국인이라는 이름은 떨쳐낼 수 없겠지만 우리 모두는 어차피 같은 인간이라는 건 변함없으며,
당신의 도전은 훗날 당신의 성장의 큰 범위를 차지하는 발판이 되어줄 거라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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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image by KAOTA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