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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a Kim Dec 11. 2019

하나만 선택할 용기

Matsumoto가 준 선물

#한달쓰기 리스트

01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02 <이별가>가 들려주는 글의 비밀

03 발라드 보기 좋은 계절이 왔다

04 가슴 뛰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05 당신의 천장은 얼마나 높은가요?

06 푸르른 2020을 위하여

07 공감할 때 생기는 힘

08 고된 현실의 관찰자가 된다는 것

09 쓸만한 인생은 쓸만한 일상에서 온다

10 하나만 선택할 용기








여행만으로 충분한 여행



여행해본 자만이 안다. 여행을 앞두고 얼마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지. 애타게 기다려온 사람을 만나기 몇 초 전의 설렘과 비슷하다. 기분 좋은 떨림이다.

 

여행을 가기 전에 생각이 분주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여기에 꼭 들러봐야지. 이 골목을 꼭 걸어봐야지. 이 음식을 꼭 먹어봐야지, 혹은 이 사람은 한 번쯤 만나고 와야지, 라는 앞선 계획들로 바빠진다.


정작 여행길에 오르면, 예정된 일정을 따르느라 조금 덤덤해진다. 그래도 멈추어 서서 점검한다. 놓치는 건 없는지, 잊은 건 없는지.


원래 난 그런 사람이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최대한의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요즘 말로 가성비 꽤나 따지는 사람.


그런데, 이번은 조금 달랐다.

여행’만’ 해도 충분하다는 걸, 가성비 같은 건 계산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야요이 쿠사마 Yayoi Kusama



마쓰모토에 방문했다. 그곳에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마쓰모토에서 유명하다는 골목에 갔다. 사진을 찍으려고 한 가게 앞에 섰는데, 창문에 야요미 쿠사마의 전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야요이 쿠사마가 마쓰모토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름만 들어서는 누구? 하다가도 점찍는 여자라고 설명하면 바로 기억나는 할머니 아티스트였다.  


<무한거울방 - 영혼의 광채>


일본의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인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고 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딸을 학대했던 어머니와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 그녀에게 미술은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는 테라피였다. 영적인 안정감을 찾고 심신의 불안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시도 같은 거였다.


그녀가 그리는 점은 그녀를 괴롭히는 환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을 계속적으로, 많이 그리면서 그 환영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교토에서 니혼가를 공부하던 당시, 젠 Zen을 연습하려고 빗 바람에 뛰쳐나가 비를 맞으며 명상을 하다가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 얼음처럼 찬 물을 머리에 뿌렸다. 그렇지 않고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내 작업의 방향 변화는 언제나 내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라고 말하는 쿠사마 야요이. 그녀가 도트를 선택하고 그 도트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그녀의 내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인 것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와 수많은 도트로 뒤덮인 그녀의 작품을 보다 보니, 단 하나가 가진 힘이 느껴진다. 그 하나를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인생.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는다.




샨텔 마틴 Shantell Martin 


야요이 쿠사마가 찍어놓은 숱한 점들을 보고 있자니, 마커 하나 가지고 세상 구석구석에 선을 긋는 아티스트 샨텔 마틴이 떠올랐다.  



샨텔 마틴은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와 도쿄를 거쳐 뉴욕 NYU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스턴 MIT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젊은 아티스트이다. 단어, 그림, 선, 연결을 만든다.  


일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녀는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 순환하는 요소들이야 말로 가장 자기 다운 시각적 모습이라고 믿고, 그 위에 아티스트로서의 스타일과 지문과 정체성을 쌓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즉흥적인 부분과 알고리듬적 부분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살펴본다고 한다.  


가장 자기 다운 하나만 해도 괜찮은 인생 — 하나만을 하도록 설계된 인생을 깊이 생각하면서 샨텔 마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녀가 인터뷰에서 했던 한 문장이 오래 남는다.


우리가 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이 우리를 선택한다.


점을 찍는 야요이 쿠사마나 선을 긋는 샨텔 마틴처럼 하나만을 하도록 설계된 인생은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 이미 예정된 인생길이지 않을까.  





론 니콜 로빈슨 Ron Nicole Robinson 


론 니콜 로빈슨이 만드는 모든 디자인은 목적이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의 속도를 늦추게 한다. 하던 것을 멈추고 바라보게 한다. 희석되지 않은 온전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미묘한 꽃 화석의 디테일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의 오브제인 꽃은 특별하기보다 평범한 쪽에 가깝다. 가을의 산책 중 만나는 코스모스,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는 데에 전혀 아깝지 않은 값비싼 장미 — 우리는 꽃에 둘러 쌓여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꽃을 깊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꽃을 화석의 모습으로 만들어 구체적이고 면밀한 요소요소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녀가 만드는 꽃 화석은 매우 특별하다. 아티스트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작품 한 점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치료가 된다. 평안을 느끼기 위해서 필요한 삶의 명료성에 닿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반복적인 작업 과정은 생각을 정돈해주고, 정신적 과잉을 정리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아트가 사람들의 인생의 배경 속에 자리 잡고 언제고 누구든 속도를 늦추려고 할 때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스테이트먼트 statement piece이기보다 배경에 스며들어 머물며 삶의 작은 디테일을 알아채게 되기를 바란다고.  


당신에게서 주목받기 위함이 아니에요.

당신이 바라보기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지요.


론 니콜 로빈슨의 작품이 그렇다. 주목받기 위함이 아닌, 바라보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되묻는단다. “그것 말고는 또 뭘 하죠?”라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대답한단다. “다른 건 안 해요. 아트만 할 뿐이죠.




하나만 선택할 용기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이에 가성비를 따져야 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렇게 바쁘고 분주한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일상도 여행도 살아낸다.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떠난 마쓰모토에서 난 완전한 반대의 ‘진실’을 깨달았다.


하나만 해도 된다. 하나만 하도록 나는 만들어졌다. 다양한 것을 다양하게 잘 해내지 못해도 괜찮다. 이 것 하나 못하냐고 누군가 지적질을 한다면 그냥 당해주어도 별 상관이 없다. 난 처음부터 하나만을 하도록 지음 받은 사람이고, 모두가 알지도 동의하지도 못한다 해도 내 인생의 결과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이니까.


내가 만든 기준에 나를 가두었었다. 세상이 만든 기준에 짓눌렸었다. 많은 것을 두루두루 잘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약점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고, 그 약점들을 마주할 때마다 울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하나만 해도 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자 약점들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었다. 나만의 특성이자 개성이자 독특한 속성인 것이다.  


용기가 필요했던 거다. 하나만 할 용기. 하나만을 하겠다고 ‘결정’하고 ‘선택’할 용기.  


나의 삶은 나의 영혼 깊은 속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므로 외면보다는 내면을 먼저 보살피고,

나의 선택 이전에 나를 선택하신 그분을 바라보고,

매일 매 순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할,


그 용기를,

나는 가을의 마쓰모토에서 선물 받았다.  


걷다가 지치면 잠시 앉았다 가도 되니까.





Sources:

Cover image by Yoona Kim

Images by Yoona Kim, Zoom On Contemporary Art,  Bonte Museum, Interior Design, Design Indaba, Ron Nicole Website, Architectural Digest, V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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