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수십 년간 버릇처럼 주장하는 몇 가지 지론이 있다. “감자칩 많이 먹으면 암에 걸린다.” “아침밥을 거르면 치매에 걸린다.” “청양고추를 넣어야 라면의 나쁜 저기가 빠져나간다.” 등. 라면의 나쁜 저기는 대체 무엇이며, 그게 빠져나간다 한들 국물로 나가는 거 아닌가 하며 따지고 싶은 말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나는 이제 입을 다문다. 아마도 아주머니들과의 대화나 방송매체 여기저기서 들은 말들로 채워졌을 엄마의 동의보감에는 사실 더 많은 정보들이 있다.
엄마가 건강을 위해 아침마다 마셔댄 온갖 종류의 물을 소개해보자면 (의학적으로 증명된 건 단 하나도 없으니 굳이 따라 하진 마시기를.) 화장실을 잘 가게 해 준다는 밤 삶은 물, 몸 안에 독소를 다 빼준다는 비트 삶은 물, 치매 예방에 좋은 식초에 절인 콩 스무 알, 위에 좋은 생감자 우유 등이 있다. 그 와중에 식초 콩은 매일 먹다가 위가 쓰려 중단했는데 알고 보니 스무 알이 아니라 서너 알이었고, 생감자 우유는 아침마다 엄마의 속을 더부룩하게 해 중단했다는 점이 나의 웃음 버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직도 방송에서 뭐가 좋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본다. 나도 방송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부분이다.
작년인가부터는 아침저녁으로 오미자를 달여 마셨다. 이번엔 뭐에 좋으냐고 물어보니 귀에 좋단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엄마가 잘 못 듣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 뒤에서 말을 하면 반응이 없었고, 가스불이 활활 타오르다 물이 넘치는 소리도 못 들었다. 엄마가 TV 볼륨 소리를 높일수록 내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대체 왜 병원에 가지 않느냐고 성을 냈다. 그러다 길에서 빵빵 거리는 차 소리도 못 들어서 큰일이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섞인 성이었지만, 늘 그렇듯 딸내미들의 걱정은 짜증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엄마는 보청기가 싫다며 몇 년을 버텼다. 보청기를 낀다는 사실만으로도 할머니가 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니 안 보이면 안경을 쓰고, 안 들리면 보청기를 끼는 거지 이게 다 뭔 소린가 싶었는데 그렇게 버티고 버티던 엄마는 어느 날인가 가족들도 모르게 보청기를 맞춰왔다. 그리고는 머쓱해하면서 고백하듯 털어놨다. 보청기를 끼게 됐다고.
보청기를 끼면서 엄마 삶의 질은 훨씬 높아졌다. 엄마가 생각했던 옛날 보청기가 아니었다. 보청기를 꼈는지 아닌지도 모를 만큼 작고 슬림한 디자인에 핸드폰과도 연동이 되고, 무엇보다 엄마 가게로 오는 손님들의 말을 잘 알아듣게 돼서 좋다고 했다. 드디어 엄마의 고집이 꺾이는 순간이었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았다. 내심 엄마 말이 맞았으면 했다. 자주 지압해 주고, 건강하게 먹고, 그렇게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아졌으면 했다. 그래, 노화가 우리 엄마만 피해 갈 리는 없지. 그래도 엄마의 엉뚱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동의보감이 쭉 이어지면 좋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그게 엄마 자신을 더 돌보고 아끼고 싶은 마음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