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닥, 아내의 프러포즈.

by 민현


연애할 당시에 아내와 나는 지방에서 근무를 했었다. 회사는 원하는 사람에 한해, 서울이 아닌 곳에서 근무를 해볼 기회를 주었었다. 서울을 포기하고 지방에서 근무를 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월세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었는데, 미혼자의 경우, 결혼 전 집을 나와 독립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자원했고, 기혼자라면,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전원생활을 경험시켜주고 싶다고 자원했다. 사내부부였던 어떤 동료는 회사 지원금을 각자 받을 수 있어서, 마치 셋이 버는 거 같다고 좋아했다.


그곳에선 출퇴근 시간이 10분이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전날 회식으로 늦게까지 술을 먹어도, 다음날 출근 걱정을 하지 않았다. 6시에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TV를 켜면 ‘6시 내 고향’ 이 나왔고, 프로야구 경기를 1회 초부터 볼 수 있었다. 퇴근 시간에만 두 시간 가까이 필요했던 서울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주는 여유를 몰랐다. 나는 아침잠이 많아서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아침에 부지런한 몇몇은 ‘아침이 있는 삶’도 누렸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선,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몇 시간의 거리를 극복해야 하는 약속은 성사되기 쉽지 않았다. 어쩌다 이쪽으로 여행을 온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또 여행을 오더라도 굳이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이상, ‘여유가 있는 삶’을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채울 수 없었다. 이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평일 저녁이나 주말엔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이 없는 게 당연했다.

‘혹시 시간이 되면..’

그곳에서 이런 말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시간이 안 되는 날은 없었다. 약속을 미리 잡을 필요가 없었다. 평일 저녁이든, 주말이든, 아내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바로 약속을 잡았다.


연애하기에 최상의 조건이었던 그 곳에서의 생활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선택에 나에게 있었다면 계속 그 생활을 택했겠지만, 그 선택은 회사에게 있었다. 몇 년이 지나 회사 사정이 변하면서, 미혼자의 독립생활을 하던 아내와 나는 지방살이를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더라도 독립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녁이 있는 삶’은 그 맛을 안 이상 절대 끊을 수가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새롭게 살 집이 필요했다. 하지만 서울살이는, 지원금까지 받았던 지방살이 와는 금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야 할 날이 두 달 정도 남았던 어느 날, 어쩌다 서울 출장의 기간이 서로 겹쳐서 퇴근 후 아내를 만났다. 오래된 칼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명동거리를 산책하다가 서울 중앙우체국 앞 벤치에 앉았고, 마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듯, 별일도 아닌 것처럼 아내가 말했다.

‘각자 집을 구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많이 들지...’

‘둘이 합치는 게 낫지 않으려나?’

‘그럼 돈 굳겠다...’

‘결혼도 안 했는데 같이 산다고 하면 부모님이 뭐라 안 하실까?’

‘뭐라 하시지...’

‘그냥 결혼부터 먼저 해야겠다.’

‘그럼 되겠네...??!!’


스쿠버다이빙을 하기로 하면서 몇 달 전 함께 예약해 놓았던 필리핀 보홀 여행을 신혼여행으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고, 그렇다면 결혼식날은 그 여행을 출발하기 전날로 하면 되겠다고 했다. 아. 아내는 이렇게나 일처리가 빠른 사람이었구나. 괜히 회사에서 일 잘한다고 인정받는 게 아니구나. 서울 중앙우체국 앞 벤치에 앉은 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내는 결혼과 결혼 날짜와 신혼여행지를 정했다.




상대방에게 결혼을 제안하는 것이 프러포즈라고 한다면, 돈을 아끼기 위해, 같이 살면서, 부모님의 눈치를 보지 않는 방법으로, 아내가 먼저 결혼을 제안했으니, 프러포즈는 아내가 한 셈이 됐다. 결혼 후 가끔씩 프러포즈를 못 받고 결혼을 한 게 억울한지

‘당신은 프러포즈 안 해?’

라고 물으면

‘그러게 말이야. 상상도 못 할 기발한 이벤트로 프러포즈하려고 내가 다 준비해 놨는데, 그걸 못 참고 네가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하며 아내의 프러포즈로 인해 선수를 빼앗겨버린 피해자 행세를 한다.


가끔 TV 예능 프로나 드라마에서, 프러포즈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고생하는 에피소드가 나올 때면 아내에게 장난을 친다.

‘다들 저렇게 힘들게 하는데, 너처럼 프러포즈 쉽게 한 사람도 없을 거야.’

결혼을 준비하는 회사 사람이 프러포즈를 위해 산 티파니 앤 코 다이아반지가 몇백만 원이나 한다고 해서 놀랐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해줄 때에도 슬쩍 농담처럼 붙인다.

‘그땐 내가 세상 물정을 몰랐어. 반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꽃다발조차도 없이 길바닥에서 한 프러포즈를 승낙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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