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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l 20. 2023

세상일이 다 미역국 같으면.


   요즘은 잘 가지 않지만 찜질방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어 머리에 쓰는 게 유행이던 시기였다.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몸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찜질방을 찾았다. 주로 나만큼이나 추위를 싫어하는 친구 하나와 함께였다. 다른 사람들은 찜질방에 어떤 의미를 두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겨우내 빠져나간 온기를 몸에 채우는 행위였다. 마치 핸드폰 충전을 하듯이 찜질방의 열기를 몸에 충전했다. 열기를 몸에 한가득 저장하고 찜질방을 나서면 겨울의 칼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친구가 찜질방을 가는 이유는 나와 달랐다. 찜질방에 있는 식당의 미역국을 먹기 위해서. 몸에 열이 어느 정도 충전되고, 이제 뱃속도 충전해야지 싶으면 나는 주로 라면을 먹었다. 이런 곳에서는 보통 라면을 먹지 않나. 라볶이나 만두 같은 것도 괜찮고. 하지만 그 친구는 늘 미역국을 먹었다.

   ‘미역국은 찜질방이 가장 맛있어. 여기선 한솥을 하루종일 끓이거든. 미역국은 그렇게 오래 끓여야 하거든.’

   미끄덩한 식감을 좋아하지 않아 미역국을 잘 먹지 않던 나에게 친구는 늘 그렇게 말했다. 친구의 권유로 한번씩 찜질방 미역국맛을 보긴 했지만, 여전히 흐물흐물 미끄덩한 식감은 별로였다. 그러면서도 미역국은 이런 맛이어야 하는구나, 오래 끓여 미역은 부드럽고, 국물은 진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도 미역국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찜질방 미역국이 나에게 맛있는 미역국의 기준이 되었다. 긴 시간을 들여 오래 끓여낸.


   미역국을 좋아하게 된 건 아내를 만나고부터였다. 아내는 이따금 미역국이 먹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아내를 따라 미역국을 먹었다. 아내와 몇 번 먹어 본 미역국은 예전에 싫어하던 미끄덩한 맛이 아니었다. 이게 원래 이런 맛이었나? 이게 왜 맛있지? 아내와 긴 시간을 함께 하면서 조금씩 아내의 입맛을 닮아 간 걸까. 어쩌면 이제 미역국을 좋아할 만큼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먹고 싶은 거 있어? 하고 아내에게 물으면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미역국이라고 답한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그럼 오늘 저녁은 미역국! 하며 시원스럽게 말하지는 못한다. 보통은 집에 사놓은 소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국물맛이야 미역이 다 내겠지만 아무래도 소고기가 없으면 섭하다. 이번엔 마침, 지난주 마트에서 40%나 싸게 판다길래 한 팩 담아와 얼려 둔 호주산 소고기가 있다. 호주산이긴 하지만 어차피 한우와 호주산을 구별할 정도로 예민한 입맛은 아니다. 오늘 저녁은 미역국이다.


국물맛 내는 건 미역이 다 한다.

   마른미역 2인분의 양을 담을 때엔 늘 조심스럽다. 이 정도 양으로 2인분이 될까?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때 딱 멈춰야 한다. 아무리 야박하게 굴어도 물에 불은 미역은 남으면 남았지 절대 모자란 적이 없었다.


   소고기는 반대다. 이 정도 양이 2인분이라고? 너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도 여전히 부족하다. 소고기를 물에 넣고 끓이면 말이 안 될 정도로 부피가 줄어든다. 아무리 넉넉하게 넣어도 소고기는 모자라면 모자랐지 절대 남은 적이 없었다.


부족한 듯한 미역과 충분해 보이는 소고기.

   부족한 듯한 미역이 온전한 2인분의 양으로 변하는 동안 핏물 뺀 소고기를 밑간 한다. 참기름, 간장을 소고기에 입히고 간 마늘을 골고루 바른다. 아직까지도 내가 만들려는 게 소고깃국인지 미역국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여전히 소고기는 많아 보이고, 미역은 그릇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소고기는 볶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양이 줄어든다. 그에 반에 미역은 끓일수록 양이 불어난다. 소고기가 미역 같으면 좋으련만. 미역국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비싼 재료는 미역이 아니라 소고기다. 가격 때문에라도 이건 소고깃국이라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가도 점점 쪼그라드는 소고기와 계속 불어나는 미역을 보고 있자면 그래, 이건 미역국이 맞네, 싶다.


부족한 소고기와 충분한 미역.

   볶아 낸 소고기와 미역이 담긴 냄비에 물을 넉넉히 채우고 가스불은 중불에 맞춘다.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끓이다 물이 졸아들면 물을 더 넣는다. 수시로 물 상태를 확인하면서 졸아든 물을 보충한다. 그리고 계속 끓인다. 찜질방에서처럼 하루종일은 아니더라도 끓일 수 있을 만큼은 끓인다. 끓일수록 미역국은 보다 더 미역국이 된다.


완성.

   아내의 입맛을 닮아가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나도 아내만큼이나 미역국을 좋아한다. 어릴 적 미역국은 거들떠도 안 보던 내가 미역국을 끓이겠다고 한 시간 가까이 냄비 뚜껑을 여닫으며 부엌을 서성거리게 될 줄은 몰랐다. 나이가 들고 아내를 만나고 미역국을 함께 먹으며 보낸 시간만큼 내 입맛이 여물어, 이제는 입안에 도는 침을 삼키며 서슴없이 미역국에 밥을 만다.


   미역국은 오래 끓여야 맛있다. 끓이는데 들이는 시간만큼 맛있다. 그저 시간만 들여 미역국이 맛있어지기를 기다리면 된다. 어려울 것이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시간만 들이면 된다는 건 쉬운 일이다. 세상에 그런 일은 정말 몇 없다. 세상 모든 일이 전부 미역국 같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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