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곁을 지켜준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무언가를 얻었을 때 감정이 +1이라면, 무언가를 잃었을 때의 감정은 -2.5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슬펐던 기억을 더 많이 기억하고, 더 오래 기억하나 보다.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행복하고 남들처럼 평범한 삶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릴 적 누군가 '꿈이 뭐야?' 하면 과학자나 의사, 화가와 같은 꿈을 꾸는 나의 친구들과 달리, 어린 나의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자책스러워서, 억지로 '선생님'과 같은 아주 평범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식물을 키워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다만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스레 진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보인다. 이렇게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해서 그동안 내가 겪은 고통들이 갑자기 행복한 기억들로 바뀌지는 않는다. 대신 행복한 기억들이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에 앞장서서 나를 지켜준다.
'그래서 행복해지는 법이 뭐야?'라고 물어본다면, 사실 아직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식물을 키우며 나의 삶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사실일 뿐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식물을 키우면 행복해져요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식이 아니다.
또한 식물을 키운다 해서 갑자기 불행하고 슬픈 일이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는 불행도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고통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쉽다. 아프다고 소리치고, 도와달라 손을 내미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방법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불안과 고통을 꼭꼭 숨기고 숨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은 척했다.
누군가 힘들 때 '조차' 옆에 있어준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사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반을 누군가에게 덜어 놓음으로써 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기쁠 때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만, 나의 기쁨을 나눔으로써 상대의 불안함이나 조초함이 '배'가 될 수도 있다. 이감 정은 질투와는 또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슬픔과 고통을 나누면서까지 가벼워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힘들고 불안할 때 내가 키우는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고, 가만히 쳐다도 보고, 허브를 쓸어 나는 신선한 향을 계속 맡기도 했다.
결국 나의 짐을 함께 짊어주고, 나의 불안을 덜어준 건 나의 작은 식물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내뱉는 불안과 고통을 그들도 다 느꼈으리라.
덕분에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항상 가볍고 상쾌했다. 결국 나에게 슬프고 슬플 때나 나를 지켜준 건, 한 없이 약한 나를 강하게 키워준 건 누군가 물을 주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누군가 옮겨 주지 않으면 평생 한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켜준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