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y Oct 24. 2021

항상 그 자리에 있던 키가 큰 그 나무

Revised on Oct 24, 2021


초여름 어느 날, 옥상에 자리한 식물들을 살피려 옥상에 들어섰는데 옥상 구석 화단에 심긴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그 해 봄부터 그 나무를 발견하기까지 적게는 매일 한 번, 많게는 하루에도 서너 번을 들락날락했는데 이미 내가 오기 몇 년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어 보이던 키가 족히 2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나무가 있었다.


 매번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없이 새로 들여온 식물들을 정리하고, 그동안 식물들이 얼마나 자라 있었나 확인하기에만 바빴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떡하니 2미터가 넘는 큰 키로 조용히 옥상 한구석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키가 큰 그 나무.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나무에 다가가 작업용 밀짚모자를 벗어 고개를 젖혀 들고 나무를 바라보니, 키가 큰 그 나무는 분홍의 꽃봉오리를 가득 안고 시원하게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수십 번 왔다 갔다 하며 다른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영양제 챙겨줄 때, 나는 키가 큰 그 나무에게 물을 한번 준 적도, 말라가는 잎을 정리해 준 적도 없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옥상에서 혼자 추운 겨울을 보내고, 눈과 칼바람을 맞으며 누구보다 봄을 기다렸을 키가 큰 그 나무. 마침내 찾아온 봄을 맞아 아름답고 탐스러운 꽃망울 가득 달아 놓고는, 이제 그 꽃망울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 내가 있었다. 


꽃망울 가득 단 옥상 나의 그 나무


또 마침 초여름 하늘과 바람은 어찌나 맑고 청량한 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키가 큰 그 나무 아래서 한참을 서있었다. 이제 내가 옆에서 너의 겨울이 마냥 춥지만은 않게 옷을 입혀주고, 혼자 외롭지 않게 말동무가 되어줄게. 그리고 네가 누구보다 치열하게 버텨 피워낸 꽃들을 누구보다 내가 사랑해 줄게. 그렇게 나와 첫 만남을 가진 키가 큰 그 나무는 꽃망울을 달고 며칠이 지나가 소중하게 품고 있던 어여쁜 꽃망울을 하나둘씩 피워내기 시작하더니, 절정으로 만개한 키가 큰 나무는 초록잎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분홍꽃을 가득 채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존재도 몰랐던,

옥상 구석에서 키만 크고 앙상했던 나무 한그루가, 

보석 같은 꽃들을 피워내는 생명이 되어있었다.  


꽃 피우는 배롱나무


키가 큰 그 나무에서 어엿한 자신의 이름을 찾은 배롱나무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비를 기다리고, 꽃망울을 맺고, 때가 되면 아름다운 분홍의 꽃을 만개한다. 혹여 봄에 심한 가뭄이 들면 그 해 여름은 꽃망울이 기대했던 바와 달리 가득 달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여 그 해 여름 예상치도 못한 강한 태풍이 불면 열심히 피워온 꽃들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 거친 비와 바람에 자신이 품어온 아름다운 꽃잎들이 처참하게 바닥에 떨어진 채 비에 젖은 모습을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키가 큰 그 나무였던 시절처럼 다시 겨울을 맞이하고, 봄을 위한 꽃봉오리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이 우연히라도 자신을 발견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지켜낸 꽃들을 보여주겠지. 


가끔 내가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이 세상에서 아무 존재도 아닌 것 같을 때, 나는 키가 큰 그 나무인 배롱나무를 기억한다. 


지금 나는 춥고 외로운 겨울을 버티고 있는 중이야, 

하지만 곧 다가올 봄이 오면 누구보다 꽃망울을 가득 달 거고,

누구보다 가장 이쁜 꽃을 피울 거야.


아름다운 나의 배롱나무 꽃




이제야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나무와 꽃이 보인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주고, 여름이 되면 푸른 잎을 넓게 펼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가을이 되면 혹여 쓸쓸할까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세상을 다시 한번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혹독하고 추운 겨울에도 나를 혼자 두지 않고 앙상한 가지들에 흰 눈을 쌓아 따뜻하게 안아준다. 겨울이 지나 또다시 봄이 오듯, 항상 그랬듯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김없이 올해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고, 따듯한 봄 같은 위로를 해준다.


하지만 가끔은 어리석게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던 것들을. 누군가 그랬다. '다시 사랑할 기회가 온다면, 예전보다 더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하였다.'라고.


그리고 나 또한 잃고 나서 다짐하였다.

이전 04화 식물이 느리게 자라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