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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어사리 Dec 28. 2023

예측할 수 없는 것과 준비해야 하는 것

재료 손질은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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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시작하고 한동안은 '오픈발'이라는 특수를 누린다고 한다. 보통은 6개월 정도라고 하지만 요즘은 3개월이라는 말을 들었다. 8월 말에 오픈했으니 11월이면 오픈발이 떨어진 건지 손님이 갑자기 뚝 끊겼다고 느낄 만큼 매출이 감소했다.

혹시나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싶어 이래저래 많은 고민을 해보았지만 결코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만 도달했다. 11월부터 12월까지 보통의 가게들은 연말연시 특수를 누린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런 특수가 없는 것인가 매장이 협소해서 단체손님을 잡지 못해서 또는 홍보가 덜 되어서일까.

홍보가 덜 된 부분은 게으른 나의 잘못이니 누구를 탓할 수 없고 11월 갑작스러운 교육들이 잡혔다. 주 업종이 교육인데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할 수도 없었기에 배달어플에는 도시락 메뉴와 재고 수급이 일정치 못한 것들은 제한적으로 판매했고 수업일정 때문에 어떤 날은 오픈시간을 늦추기도 했으며 가게 문 열고 3개월 넘게 쉬지 못했었지만 11월 전후로는 주마다 쉬기도 했고 불특정 하게도 일요일을 두 번이나 쉬기도 했었다.


쉬는데 매출이 나올 리 없고 노출되는 메뉴와 준비가 적은데 매출이 잘 나온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체념하듯 초심을 찾으며 다시금 달리기로 했다.

문득 주변 베테랑 사장님들에게 이래저래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며 조언을 구했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절대 너의 부족함이 아니다 모두가 힘들고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훨씬 많다고들 말씀해 주셨다.

경기침체는 예상되던 바였고 주머니 사정이 월급과 상관없이 일정한 이들은 여전히 같은 패턴으로 소비 중이다. 그러니 소비패턴이 일정한 이들을 고객으로 잡든가 아님 그만큼의 매력이 있는 매장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손님은 손님이다. 없다가도 갑자기 오는 것이고 어제 온 손님이 오늘 또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술보밥상의 가장 장점이자 단점은 폐쇄성이다. 한번 온 손님이 너무도 만족해 주변에 소개해주기 싫은 매장이라는 의견도 있다. 소규모로 옹기종이 모여 앉아야 하고 10명 이상의 단체손님은 무리인 곳, 기본 안주가 나오지만 그냥 내어주는 안주들의 기본가가 메뉴의 가격을 뛰어넘을 때가 많다.

고객입장에선 가성비와 가심비 모두를 충족하고 많은 사람들을 마주 치치 않아도 된다는 장점까지 갖췄지만 새로운 유입이 되지 않는 곳, 결국 한번 온 손님은 대부분 단골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니깐 그래 역시 버티는 것이 답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위해서, 그것도 두루치기 맛집이라고 자부하는데 두루치기 기본재료 준비를 빼놓을 수 없다. 대파와 양파, 양배추 등등 야채를 씻고 다듬는다.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3일이면 소모될 양이었던 야채들이 일주일을 가도 소비가 힘들 때가 있다. 판매용 돼지고기도 하루면 소비되던 양을 3일에 소비하기도 하고 때론 예상하는 때에 소비되지 않아 식구들이 그냥 먹어버리기도 한다. 이런데도 준비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준비 없이 되는 것이 없다. 하물며 베짱이 넘치다 못해 호강에 끈을 매달아 놓은 건지 때때론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재료다 싶으면 오겠다고 전화 오는 고객한테 "오늘은 준비된 것이 없으니깐 드시고 싶은 안주 사 오세요."를 남발한다. 

에휴......


단골들만 오다 보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매번 맞출 수가 없고 때때론 그들의 바람은, 나의 음식보다는 가게 분위기와 나를 좋아해서 오기도 한다. 이미 다른 곳에서 고기이상의 것들은 먹었는데 두루치기와 닭발을 권할 수도 없고 백숙을 먹고 온 고객에게 햄부대찌개 같은 것을 권할 수 없다.

어쩌면 같은 메뉴를 다른 곳에서 먹고 왔더라도 팔 수 있는 대담함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못한 못난 사장은 고객에게 그저 이실직고하며 소고기가 먹고 싶으면 소고기를 사 오라 하고 고등어구이가 먹고 싶으면 고객 본인의 냉장고에서 꺼내오라고 한다. 

이 무슨 황당한 주문일까 싶지만 실제로 그렇다.

고객의 니즈가 명확하다. 손질된 순살노르웨이 고등어를 주로 준비해 놓는데 고객은 뼈가 붙어있는 국내산 간고등어를 원한다. 게다가 살이 두텁게 오른 큰 사이즈의 갈치를 원한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 당장 가서 사 오기도 애매한 시간, 그럴 때 솔직하게 말한다.

"드시고 싶은 거 가져오세요."


가끔은 먹고 싶은 술이 매장 내에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막걸리 종류나 시중에서 쉬이 구하기 힘든 양주 종류, 이런 것들은 당연하게 콜키지(코르크 차지 Cork Charge, 본인이 가진 와인을 식당에서 마실 경우 내는 비용)가 적용되지만 음식은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보통 그런 경우 고객들은 콜키지에 해당하는 값만큼 가벼운 안주를 시키거나 술을 많이 마시거나 어떤 때는 알아서 상응하는 비용을 책정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기본적인 것들은 늘 준비해 두고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요즘 들어선 소고기나 삼겹살, 꽃게 등등 다양한 니즈가 있었다. 물론 다 수용했다. 대신 요리하는 것에 대한 수고비를 지불받았고 술을 판매했다.


몇 번 해보고 나니 재료 수급에 대한 부담이 없고 소고기와 돼지고기구이용은 등급과 부위가 워낙 다양해서 가끔은 특정등급과 부위만 원하거나 또는 자신이 원하는 브랜드 등등 맞추기보다 그들이 직접 구매해 오길 부탁했다. (만약 술고래밥상에서 소고기나 판매하지 않는 고기구이를 드시고 싶을 땐 꼭 미리예약 바랍니다.)


크리스마스이브, 손님이 있을 거란 기대감은 애초에 버렸고 그저 1월까지는 열심히 문안 닫고 버티자는 마음으로 열어두었다.

자주 오는 단골고객이 좋은 사람들과 마시려고 아껴둔 발런타인 21년을 들고 오셨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 같은 밸런타인 21년, 좋은 분들과 함께 한잔 마셨다.

오랜 전 스코틀랜드의 어느 마을에 발런타인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여러 물품을 취급했었지만 상점이 잘되어 점점 커지면서 위스키도 유명해지고 유명해지고 보니 위스키도 맛있었다고 한다. (당시 위스키들이 대부분 블렌디드가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맛이 참 좋았다는 설이 있다.) 그 명성 그대로 현재의 밸런타인 위스키는 유명해졌고 스카치 위스키이면서 블렌디드 위스키 중 꽤 무난하고 고급스럽다고 평가받는다.

개인적으로 발런타인 21년과 발런타인 30년 모두 다 마셔봤다. 향과 맛 모두 숫자가 클수록 더 좋다. 그러나 가격적인 측면에서... 무난하기는 발런타인 17년이, 그것도 물론 평범한 가격은 아니긴 하다.


조용하게 문을 닫을 줄 알았던 크리스마스이브, 눈과 함께 발렌타인 21년과 함께 내년에도 좋은 고객들과 함께 즐거운 날을 맞이할 거라는 기대감을 바라본다. 

혹시나, 발렌타인 상점에서 발렌타인 21년처럼 술보밥상도 많은 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곳이 되길 기대한다.


Happy New Year.

Thank you.




사진출처 픽사베이, Jacqueline Macou


단골이 늘어나고 단골들은 다양한 바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100% 다 충족할 수 없고 충족시키기도 어렵지만 대표메뉴들을 놓지 않으며 다양한 고객들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이 외부음식이었습니다. 외부음식에 대한 적당한 자릿세(?) 서로가 윈윈 할 수 있고 대부분의 고객들은 시간만큼의 자릿세 충족할 만큼의 가격을 지불해 줍니다. 

만약 5명이 와서 3시간 동안 맥주 한 병씩 먹는 것과 3명이 와서 소주 6병과 안주 1가지 그리고 외부음식으로 인한 세팅비까지 지불한다면 사실은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가게 입장에선 좋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외부음식을 가져왔다고 해서 꼭 많이 지불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없어서 매장이 한산한 것보다는 훨씬 장점이 많습니다.

가끔은 장소 대여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도 해봅니다.

관심 있게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2024년도 잘 부탁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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