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에서 ‘심장 학살용’이라 불리곤 하던 바로 그 지니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툴박스에서 꺼낸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자연스러웠다.
“어머? 쌤도 그런 말 쓰세요? 맞아요. 대회 끝나자 마자 길캐 들어왔어요. 그때 심사위원으로 왔던 뤼미에르 엔터의 이주란 이사가 만나자고 했거든요.”
이주란. 나도 아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리 긍정적인 인상을 남긴 인물은 아니었다. 인터넷 플랫폼 재벌인 마인이 세운 엔터사 뤼미에르에서 배임, 횡령죄로 고발 당하고 이사직에서 해임되었다는 기사를 통해 이름을 알았으니까.
“연습생 들어오라고 하든?”
“그게요, 참 신기했어요. 그런 말 전혀 안했어요. 연습생 들어오라고 하거나 데뷔 시켜준다 그러거나 그랬으면 저 거절했을 거거든요.
전 그때 진로를 다 짜놓고 있었어요. 성대, 한양대 정도 영문과 가서 과외나 알바 하면서 세종대 글로벌 실용무용과 학점 이수하고, 3학년부터 연극 부전공 신청해서 뮤지컬로 넘어가는 걸로. 연고대, 서강대, 이대는 연극과가 없어서 패스. ”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만 부끄러워졌다. 나는 고1 때 어땠던가? 아무 생각 없었다. 심지어 대학 들어 갈 때도 진로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경로를 그리거나 하지 않았다. 심지어 퇴직 하면서도 이후 경로를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고 그냥 집에서 놀았다. 60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고1 때 김예진 만도 못 한 것이다.
절박함이 그 아이를 그렇게 조숙하게 만들고, 유복함이 나를 철부지로 만들었다. 그래도 나는 애써 선생의 위치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럼 뭐라고 했는데?”
“그 분이 ‘김예진, 어디 갔나 했더니 외고 갔구나. 그래서 안 보였어.’ 이러는 거에요.”
“기획사 이사가 네 이름을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알죠. 그쪽 분들 예쁘고 춤 잘추는 애 있다 그러면 정보 파악 다하고 눈에 불 켜고 관리해요. 중학생일때는 관찰만 해요. 애가 스스로 오면 모를까, 잘못하면 아동청소년보호법에 걸리거든요. 일단 레이다에만 올려두죠. 영상 다 퍼가고, 대회도 와서 체크하고. 그러다 고등학생 되면 바로 명함 들고 와요. 막 꼬시죠.
그런데 제가 외고로 진학하니까 레이더에서 사라진 거죠. 추적 포기했을 수도 있고요. 중학교때 춤 잘 추던 애가 고등학교를 외고로? 그럼 바로 답 나오죠?”
“공부 선택했네. 춤 접었다.”
“그쵸. 그런데 그 김예진이 대회에 다시 나타난거에요. 그럼 당연히 만나죠. 거기까진 예상대로였어요. 예상과 달랐던 건 중소회사가 아니라 대기업에서 왔다? 스카우터가 아니라 무려 이사가? 그런데 그 분은 아이돌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고. 그저 ‘댄스, 계속 배우고 싶니?’ 이랬을 뿐. 고개를 끄덕였죠. 그랬더니 ‘원하면 우리 회사 연습실에서 같이 배워. 중학교 때처럼.’ 이러는 거에요.”
“그래서?”
“아무 대답 안했어요. 거기서 ‘바우쳐가 없어요’ 이런 말을 챙피하게 어떻게 해요? 계속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분이 내 맘을 읽었는지 ‘무료야. 방과 후에 학원 간다 생각하고 와. 강요는 안 할게. 나중에 혹시 생각나면 와.’ 딱 이랬어요. 그리고 더 이상 와라, 마라 얘기 안하고 명함 한 장 주고 가버렸죠.”
“그래서 거기 찾아갔어?”
“아뇨, 연습생 하라 안할게. 그냥 와서 춤만 배워. 무료야. 이런 말을 다 믿을만큼 제가 허술해 보이세요?”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런데 못 견디겠는 거에요. 차라리 우승하지 말 걸 그랬어요. 우승 하니까 댄스 동아리가 사실상 해산되었어요. 이해 해요. 다른 아이들 입장에선 스펙 올리는 거 성공했으니까 더 할 이유가 없었던 거에요. 공부 하다 학교 축제때 다시 모여 연습하자 이러겠죠.
하지만 전 매일 춤을 춰야 했고, 혼자 춤추는 거, 그거 정말 때로는 내가, 죄송해요, 미친년 처럼 느껴져서 너무 힘들었어요.
안되겠다. 스튜디오 다녀볼까 하는 생각에 계산기 막 때려 봤어요. 스트릿 재즈, 코레오댄스 하는 스튜디오 월 수강권을 알아봤더니 15만원이래요. 그때 엄마, 아빠 월 소득 다 합쳐도 190만원이었요. 다섯 식구 살아야 하고. 어림없는 이야기죠.”
순간 나는 서늘한 공포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엔터업계의 마녀라고 불리는 이주란이라면 예진이 같이 영리한 아이가 “공짜로 해줄게, 연습생 하라 안할게”라는 말을 믿을리 없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 믿어도 어쩔래, 올 수 밖에 없는 거 알아.”하며 미끼를 던진 것이다. 미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춤을 추기 위해 잡아야만 했던 예진이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예진이는 춤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존재가 무너지는 상태에 가까웠고, 이주란은 그 냄새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올 수밖에 없는 애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끼리 이렇게 이야기 했겠지. 예진이는 그걸 알면서도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이고. 적어도 드러난 모습으로는 ‘자발적’으로.
“그렇게 뤼미에르 엔터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일단 이주란 이사가 상상 이상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어요. 연습생도 아닌 일반인 학생을 대기업 이사가 직접 맞이하고 친절하게 안내도 하고.
그때는 이게 말도 안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더 이상한 것은 안내 받아 간 연습실에 연습생이 아무도 없었어요. 선생님만 네 분이 기다리고 계셨어요. 한 분은 이미 중학교때 배운 적 있어서 아는 분이었고요.”
“아니, 선생이 넷? 그게 무슨 상황이야?”
“정말 이상하죠? 어쨌든 그날 부터 전 방과후에 무조건 뤼미에르로 갔어요. 가면 선생님 네 분이 기다리고 있었고. 같이 춤 추었죠. 아이돌 노래 같은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들이었고, 안무도 첨 보는 것들이었어요. 하지만 금방 익혔죠. 그러자 안무 샘이 그러는 거에요. ‘예진이는 완전 안무 복사기네’. 이때부터 이 말이 제 별명이 되었죠.”
“복사기? 미안한데 나한테는 좀 그런데? 창의성 없다, 모방한다 그런 느낌이라?”
이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예진이가 잠시 눈을 홀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쌤, 첨 듣는 곡 듣고 바로 피아노로 칠수 있으세요?”
“그건 어렵지.”
“만약 쌤이 천재 피아니스트라면요?”
“그럼 어지간한 곡은 듣고 바로 칠 수 있을거야. 실제 그런 사람도 있고.”
“마찬가지랍니다. 첨 보는 춤인데 한번 보고 바로 따라한다? 이거 쉽지 않아요. 저니까 된다고요. 워낙 다양한 춤을 잡식하다 보니까 말로는 못해도 동작들이 개념화 되어 몸에 새겨져 있다고요. 전문 용어로는 모션 모듈화라고 하죠.”
“모듈은 교육학에서도 써. 수업을 모듈화 하면 나중에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하기 좋지.”
“맞아요. 전 처음 보는 춤이라도 동작 하나하나 따라 할 필요 없었어요. 심지어 안무 샘이 새 안무 시작 부분 보여주면 그 다음 부분 안 보고도 미리 할 수도 있어요. 이 동작 다음에는 이렇게 갈 수 밖에 없어, 이러면서. 그래서 안무 복사기, 안무 동기화 등등 별별 말 다 들었어요.”
나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음악으로 치면 완전 절대음감이란 뜻이다. 이 경우에는 절대 몸감?
“내 귀에는 그냥 천재로 들린다. 천재 댄서.”
“그쵸? 정답! 그런데 이 바닥에선 그 말을 죽어도 안 붙여 주더라고요? 고마워요. 쌤이 처음으로 그렇게 불러주신거에요.”
“그런데 거기서 재미 있었니?”
“재미 있었죠. 그 샘 네 분은 아이돌 댄스 말고 다른것도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힙합, 스트릿 재즈 등등. 컨템포러리 전공하신 분도 있어서 그것도 배웠어요. 약간 모던 발레 같은거. 그렇게 두 달 정신 없이 보냈죠.
각오는 하고 있었어요.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요? 이러다 결국 연습생 계약서 들이 밀겠지, 그럼 할 수 없지. 이런 생각 하고 있었죠. 아니나 다를까 이주란 이사님이 오시더라고요. 이 회사는 이사가 일개 연습생 후보한테 신경쓸 정도로 한가한가 이런 생각했죠.
‘곧 여름 방학이지?’
고개를 끄덕였죠.
‘연습생 에이스들하고 같이 합숙하면서 연습할 생각 없어?’
아이고. 그 놈의 에이스란 말에 낚였어요. 에이스? 대형 엔터사 에이스? 와, 한번 겨뤄보고 싶다. 이런 생각.
그래서 기말고사 끝나자 마자 체험학습 내고 7월 15일부터 8월 말까지 ‘숙소’라고 불리는 곳에서 합숙하기로 했어요. 에어컨 없는 좁은 반지하에서 한여름 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무조건 예스 할 상황이었고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 했다.
“굶어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예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쌤. 저, 중학교 때도 학교가 먹여 살린 거 아세요? 아침은 거르고 학교에서 먹는 점심 급식, 저녁 급식.”
“방학때는?”
“구청에서 카드 나왔어요. 그 카드 들고 지정된 음식점 가면 쿠폰처럼 쓸수 있었죠. 학교 급식만 못하고, 하루 한 끼 밖에 안 나오지만 그래도 숨은 붙일 수 있었죠. 제가 가던 일본 가정식당 사장님이 그런 사정을 아시는지 한끼 식사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돈가스를 주셨죠. 그럼 다른 손님들이 신기하게 쳐다 보고. 날씬한 애가 엄청나게 먹어대니 막 인지부조화 왔을 거에요.
그런데 고등학교 가니까 똑 끊어지대요. 고등학생은 선별 지원한데요. 알바 나갈 수 있는 나이라 이거죠. 그런데 외고생은 너무 당연히 지원대상 탈락. 웃기죠? 다른 친구들은 여름방학이 다가오면 학원 빡세게 도는거 걱정하거나, 해외여행 얘기하죠. 그런데 전 끼니 걱정했어요. 그런데 합숙이래요. 에어컨 있는 데서 먹여주고 재워준대요. 그걸 어떻게 거절해요?”
예진이의 이야기는 이제 비극적 정조마저 띠고 말았다. 빼어난 외모, 영리한 머리, 남들이 보면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은 아이지만 결국 돈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본주의의 철칙이 이 아이를 남아 있는 하나의 길로 사정없이 몰고간 것이다. “네가 가진 자원 중 가장 비싼 것, 외모를 팔아라.” 라고 강요하며.
예진이 의외로 담담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합숙소는 회사 빌딩 꼭대기 층에 있었어요. 게스트 하우스처럼 꾸며 놓았더라고요. 합숙소 올라가는 동안 연습생들을 마주쳤어요. 우호적인 눈빛들이 아니었어요. 어떤 애는 고개를 돌렸고, 어떤 애는 그냥 내 얼굴을 쓱 훑고 지나쳤어요.
그 중 분명 나보다 언니로 보이는 연습생이 있었어요.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갑자기 허리를 숙여 인사 하는 거예요. 그 순간 느꼈어요. 뭔가 이상하다. 그때 알아 챘어야 했어요. 하긴 알아 챈들 어쩌겠어요?”
“언니로 보이는 연습생이 왜 허리를 숙여?”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죠. 그땐 그냥 깜짝 놀라서 저도 같이 허리를 90도로 숙였어요.
숙소에 가니 담당 실장님이 먼저 와 있던 멤버들, 그 에이스들 소개시켜 주었어요. 저 보다 네 살 많은 다엘 언니, 한 살 위인 세이 언니, 하린 언니, 그리고 나랑 동갑인 소이. 다 예명이고 저만 예명이 없었죠.
깜짝 놀랐어요. 다들 너무 예쁜거에요.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내가 제일 예쁜 애가 아니라 원 오브 뎀이라고 느낀 거. 한 학기 만에 제 자존심 두 개가 다 무너진 거에요. 외고 가니까 95점은 너무 당연한 게 되었고, 숙소에 들어오니까 예쁜 게 너무 당연한게 되었어요. 그럼 남은 건 하나, 춤. 이것만은 지키고 싶었어요.”
“그래, 그 에이스들은 어땠는데? 춤으로 상대할만 했어?”
“다들 춤을 잘 추긴 했지만 그냥 아이돌 댄스였고, 승부욕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어요. 각자 다른 역할들이 있었던거죠.”
“각자의 역할?”
“다엘 언니는 리더에요. 클래식으로 말하면 지휘자죠. 비발디 사계 이런 거 보면 지휘자가 바이올린 연주하면서 지휘하잖아요? 그런 역할이라고 보면 돼요.
세이 언니는 랩 담당이에요. 브리지 부분에서 힙합 동작으로 분위기 잡는 역할도 했죠. 뭐랄까 괴짜라고 할까, 천재라고 할까? 필 한 번 받으면 순식간에 가사가 툭툭 튀어나오고 그걸 랩하고 믹싱하고 음원까지 컴퓨터 두두둑 두드려서 뽑아냈어요.
하린 언니는 보컬. 정말 노래 잘하고, 피아노 잘 치고, 작곡도 하고. 유노이아 앨범 보시면 노래 대부분이 작사 작곡: 세이&하린 이렇게 되어 있을 거에요. 실제로 두 언니는 늘 한 몸, 한 유닛으로 움직였어요.
그리고 저랑 동갑인 소이. 음. 소이는 비주얼이죠.”
“그러니까 리더, 랩, 보컬, 그 중 랩, 보컬 멤버가 작곡 유닛. 넌 댄서. 여기까진 금방 이해 되는데 비주얼?”
“문자 그대로. 비주얼이 소이 역할이에요.”
“그냥 예쁘다 이게 역할이라고?”
비주얼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불쾌했다. 이런 노골적인 성 상품화를 봤나? 무슨 가수가 노래도, 춤도 아닌 비주얼이 역할이란 말인가?
내 당혹스러운 얼굴을 본 예진이가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예쁘다고 그냥 되는 게 아니에요. 예쁜 애들도 종류가 있어요. 어느 각도에서 봐도 다른 예쁨이 계속 나오는 애가 있고, 딱 정해진 각도에서만 빛나는 애가 있죠. 둘 다 보는 사람을 놀래키는 순간이 있죠. 앞의 애는 볼 때마다 새로운 예쁨이 생기니까 놀라고, 뒤의 애는 문득 안 예뻐 보이는 순간이 있어서 놀라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왜 내가 중학교 시절 예쁜 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예진이를 볼 때마다 자꾸 놀랐는지 깨달았다.
볼때 마다 각도, 광선, 상황이 달라지면 그 때 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짝였던 것이다.
“딱 너네. 볼 때 마다 늘 새롭게 예뻤어.”
그런데 예진이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열 번 보면 한 번은 안 예쁜 각도가 있어요. 얼굴 작은 건 사진 찍을 땐 도움이 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얼굴이랑 목이 기둥처럼 붙어 보여요.”
“그렇게 올려 볼 일이 뭐가 있어? 어린애가 보는 거 아니면.”
“아니죠. 그게 무대 위에 있을 때 딱 팬석에서 보는 각도거든요.”
“아, 이런.”
“그래서 아이돌은 춤 춰야 해요. 대체로 얼굴이 조막만하니까. 무대에서 멈추면 그 각도가 그대로 노출되거든요. 제 얼굴은 특히 더 그렇고. 정면에서는 작고 옆에서 보면 앞뒤로 길잖아요? 딱 댄서 상이죠. 멈추면 미워진다. 뛰어라. 이런거죠. 근데 소이는. 그런 게 없는 아이였어요.”
“날로 먹네? 그럼 가만 서서 얼굴만 보여주면 되는거야?”
“쌤. 그건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고 소이가 무대에 말뚝처럼 서 있을 수는 없죠. 그 아이는요 자기 예쁨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어떤 각도, 어떤 광선에서 어떻게 예쁜지 다 알고 있었고, 상황마다 어떤 예쁨을 꺼내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요. 선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첼로를 연주하는 것 같았죠. 그걸 본능적으로 한 건지, 스스로 연출한 건지 뭐, 본인만 알겠죠. 근데 저희 세계가요, 100% 무결점 미인이 와서 눈빛 하나로 저 같은 90%짜리들 압살하고 그러는 곳은 아니에요.”
“하하하. 그 와중에 너 90%는 된다고 슬쩍 띄우네?”
“그 이상은 양보 못하죠. 10% 정도야 내가 어떻게 춤추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범위니까.”
“숙소 생활은 어땠어?”
“천국이었어요. 보통 데뷔조 숙소 생활 힘들었단 얘기 많이 하는데, 전 전혀 안 그랬어요. 작지만 각자 방이 있었고요. 원래 방 하나에 파티션 설치해서 둘로 나눈 거라 다른 멤버들은 불편해 했는데, 저는 태어나서 처음 나만의 방에서 잔 거라 너무 행복하게 꿀잠을 잤어요.”
“먹는 건 어땠어? 비인간적인 다이어트 시킨다고 신문에 나기도 했는데, 하루 1000칼로리 이하만 먹이고 굶긴다고. 굶지 않으려 들어갔는데 굶기면 그것도 고역이잖아?”
“그렇게 무식하게 굶기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건 중소사 얘기고, 뤼미에르는 아이티 재벌 마인 계열사라 굶긴다기 보다는 식단관리가 철저했죠. 컴퓨터처럼. 굶기면서 그 많은 안무 연습 시키는건 애 죽으란 소리죠.
아침에는 채소, 과일, 치즈 종류, 점심때는 탄수화물 위주, 그리고 저녁은 단백질 위주, 이렇게 딱 짜여진 식단이 나왔고 맛도 좋았어요. 과자, 아이스크림, 라면은 철저히 금지. 다른 멤버들은 힘들어 했어요. 하지만 전 그게 다이어트는 커녕 평소 보다 훨씬 잘 먹는 거라 배가 불러 억지로 넘길 지경이었어요. 간식 금지? 애초에 간식 먹는 버릇 없어서 아예 생각도 안 났어요.
그런데 소이는 그게 내숭 떠는 걸로 보였나봐요. 슬그머니 다가 오더니 ‘간식 먹고 싶으면 그렇게 말해. 아무도 뭐라고 안해.’ 이러고는 가는 거에요. 그냥 뭐지? 왜 저래? 이런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그러고 보면 소이는 숙소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은근히 적대적이었어요. 처음 상견례 하고 뒤로 돌아서서 언니들한테 ‘생각만큼 예쁘지 않아’ 이러는 거 다 들었거든요. 그러자 세이 언니가 일부러 들릴 정도로 ‘그거야 뭐, 쟤 지금 생얼이니까.’ 이랬어요. 그 말에 소이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 보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내가 뭘 하기만 하면 은근히 칭찬하는 척 하면서 속 긁는 말을 하곤 했어요.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 안나요. 그런 거 기억해서 뭐해요?”
“아니 그 아이는 왜 그런 거야? 넌 화 안 났어?”
“처음엔 화 났죠. 하지만 처음으로 그 네 명이랑 같이 합을 맞추면서 소이가 왜 그랬는지 알았어요. 처음 같이 춤을 추는데 저도 놀라고 그 네 명도 놀랬어요.
처음 맞춰보는 건데 여러 달 같이 연습한 것처럼 합이 딱 맞았어요. 회사 연습실 처음 찾아갔을 때 처음 듣는 노래, 처음 보는 안무 배웠고, 안무 샘이 네 분이라 놀랬다 했죠? 그런데 안무 샘들이 그 네 명 대역을 해 주신 거였어요. 그 네 명이 연습할 땐 분명 안무 샘이 제 대역을 하셨겠죠.
연습한 안무가 네 개였는데 그 중 둘은 제가, 둘은 소이가 센터였어요.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렸어요. 이들은 그냥 연습생 에이스가 아니라 데뷔조라는게 분명해졌어요. 맙소사, 춤을 추면서 머리속이 하얘졌어요. 연습생 계약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대기업에서 런칭하는 걸그룹의 데뷔조라니? 그것도 센터에.”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복지 바우쳐가 끊어지면서 춤출 기회가 사라지고, 심지어 방학 중에는 생존의 위기까지 느낀 예진의 모습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연예계라는 거미줄에 걸려 들어가는 작은 나비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 달 합숙을 하며 합을 맞췄어요. 노래하며 춤추는 연습까지 들어가자 더 의심할 여지도 없었죠. 아이돌 그룹 데뷔 확정인거죠.”
“난 늘 그게 신기했어. 대체 춤추면서 어떻게 노래 부르는거야? 너 노래하는 거 보면 춤 추느라 호흡 싣기 곤란해서 가성으로 부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너무 신기했어.”
“맞아요. 춤추고 뛰어다니며 노래하려면 호흡 깊게 실을 수 없고, 두성 제대로 못 써요. 그래서 음정 박자만 정확히 맞추고 소리는 되도록 맑고 얇게 내면서 불러요.
그마저 쉽지는 않아요. 헉헉 소리 안내고 노래해야 하니까. 그래서 연습 지독해요. 줄넘기 하면서도, 러닝머신 달리면서도, 푸시업 하면서도 노래 연습해요.
립싱크 의심하는데, 녹음된 노래 같이 트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걸 그대로 내보낼지, 저희가 무대 위에서 부르는 목소리를 섞어 쓸지, 얼마나 섞어 쓸지는 음향감독님이 정해요. 우리는 그저 ‘이건 생라이브다’라고 믿고 온 힘을 다해 부를 뿐이에요. 립싱크겠거니 하고 입만 벙긋거리다 MR 뻑나면? 바로 짤 돌고, ‘실력 없다’고 찍히죠.
춤만 해도 힘들어요. 근데 노래까지 하면요, 정말 숨이 안 쉬어져요. 세 곡쯤 하면 청색증이라도 올 것 같죠. 특히 메인 댄서인 저는 더 심하죠. 그래서 공연 중간에 꼭 팬들과 잡담하는 타임 들어가는 거예요. 파트 짧았던 멤버들이 열심히 팬들과 수다 떨면서 메인 댄서, 메인 보컬 회복되는 시간 벌어주는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그래요. ‘아이돌은 노래 안 해. 그냥 예쁜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면 되잖아?’
지금까지 이 말, 저 딱 호흡 세 번으로 끝냈어요.”
한꺼번에 엄청나게 많은 말을 쏟아낸 예진이가 숨이 찬지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깊게 숨을 쉬었다.
나는 아이돌 그룹을 ‘그저 예쁘기만 한 아이들’이라 생각하던 편견이 흔들렸다. 예진이가 어쩔 수 없이 아이돌이 되어야만 했다고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예진이는 일단 선택했으면 후회를 남기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예진이 말을 이어 나갔다.
“아쉽지만 춤 추면서 노래도 하는 것과 그 노래를 잘 부르는 건 또 다른 얘기죠. 호흡은 춤 추는데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큰 소리는 못 내고, 마이크 바짝 붙여 작은 소리로 가볍고 얇게 부르고, 거기 리버브 넣어 스피커로 뿌리는 거, 그 이상은 힘들어요. 대신 아무리 숨차도 음정은 절대 흔들리면 안돼요.
사실 저도 그렇고 우리 멤버들 다 노래 잘 불러요.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세워 놓으면 거의 천사들의 합창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아이돌 그룹이 아카펠라 팀은 아니니까 춤을 춰야죠.
대신 메인 보컬인 하린 언니는 주로 상체로만 춤 추고 다리는 고정 시키고 노래하는 안무가 많아요. 그럼 다른 멤버들, 특히 메인 댄서가 댄스로 커버하고, 그런 식으로 진행하죠.”
“아, 그렇구나. 그럼, 그렇게 합숙 들어가고 결국 데뷔 한거야?”
“그게 또 이상하게 흘러갔어요. 사실 무서웠어요. 데뷔한다는 건, 다시는 못 돌아간단 뜻이잖아요. 학교도 자퇴 아니면 전학이고.
하지만 결심했어요. 내가 데뷔조라고? 어차피 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아요? 데뷔 하라고 하면 데뷔하는 수 밖에. 지난 몇 달간 강습비랑 한달 반 합숙비용 내노라고 하면 그냥 우리 집 파산이에요.
기왕 그렇게 된게 기쁘게 하기로 마음 먹었어요.데뷔 하자. 이게 운명이면 데뷔하자. 기왕 그렇다면 최고의 아이돌이 되자. 그래서 차트를 싹 쓸어버리자.
그런데 막상 결심, 각오 했는데, 아무 이야기가 없는 거에요. 여름 방학 다 끝나고 퇴소 날짜가 다가오는데 아무 얘기가 없었어요. 소이랑은 사이가 좀 그랬지만 언니들하고 많이 친해져서 퇴소할 때 막 울고 그랬어요. 그런데 언니들은 남고 저만 나갔죠.
개학하고 학교 다니고, 방과후에만 회사 가서 멤버들하고 연습하는 이상한 패턴이 계속 되었어요. 달라진 게 있다면 누가 와서 자꾸 찍더라고요.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아무 얘기는 없었어요.”
나는 순간 엔터계의 마녀 이주란의 수법이 느껴져 치를 떨었다. 예진이가 아무리 영리한 아이라고 해도 고작 고등학교 1학년. 그 거친 엔터판 남자들을 교묘하게 주무르는 이주란이 예진이 하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런 확답을 주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필, 메이킹 필름 등에 필요한 촬영만 진행되고 있었단 뜻 아닌가?
이건 전형적인 “내가 너를 픽업했다.”가 아니라 “받아주었다.”로 바꾸어 지배하려는 수법이다. 예진이 처지에서는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하필 이때 아빠가 해고당했어요. 무슨 파업인가 태업인가 주도했는데 배신 당했어요. 탄압 들어오자 마자 동지는 간데 없고 혼자 깃발들고 남아버린 거에요. 결국 다 뒤집어 쓰고 짤렸죠. 이제 월 190도 아니고 70만원으로 다섯 식구가 살게 생긴 거에요.
입이 바짝 말랐어요. 그런데 9월이 지나고 10월 중간고사까지 다 치렀는데 말이 없었어요. 카메라만 계속 쫓아 다니고. 시험은 죽을힘을 다해서 쳤어요. 어쩌면 외고생으로 치를 마지막 시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서 간신히 내신 10% 이내에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연습실에서 멤버들하고 있는데, 이주란 이사가 사무실로 불렀어요. 세이 언니가 갑자기 ‘만세!’ 하고 소리치더군요. 소이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지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사무실에 갔더니 넓직한 테이블에 서류가 한 보따리 펼쳐져 있었어요. 그 앞에 이주란 이사와 회사 법무팀장이라는 분, 그리고 변호사 한 분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이주란 이사가 말했어요.
‘짐작했겠지만 이제 우리 회사에서 예진이하고 계약을 하려고 해.’
‘연습생 되는 건가요?’
‘아니. 결론부터 말할게. 여기 사인하면 넌 뤼미에르 엔터가 런칭하는 첫번째 걸그룹 유노이아의 메인 댄서, 퍼포먼스 센터, 서브 보컬이 되는 거야. 강요는 안 해. 보다시피 서류가 이렇게 많아. 부모님 모시고 와서 설명 다 듣고 동의서 받아야 계약이야.
오늘은 너 예명 정하고 부모님께 서류 보여드리라고 불렀어. 학업보호 조항 들어 있으니까 학교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리고 예명, 이거 생각해 봤는데, 예진이란 이름은 아이돌 이름에는 좀 안 맞아. 너무 사극 분우기라. 그래서 이걸 살짝 틀어서 예니라고 해 봤어. 어때? 귀엽지 않니?’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어요. 내가 걸 그룹? 그것도 센터?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어요. 오히려 무서웠죠. 하지만 예명 그건 막아야 했어요. 예니라뇨? 제가 어떻게 그 이름을 써요?
‘예니는 안 돼요.’
그런데 입이 잘 안 떨어져 간신히 이렇게 말했어요.
‘왜 예쁘고 본명하고 연결도 되고 좋은데?’
이주란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옆에 있던 법무팀장이 말했어요.
‘그 이름 곤란해요. 겹칩니다.’
그제서야 이주란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아, 그렇다. 그 첼로하는 애. 그럼 안되겠네. 그럼 예니 대신 예지니, 아, 지니라고 하면 되겠다. 이것도 귀엽네.’
그렇게 저는 아이돌 지니가 되었어요.”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잠깐, 그 사람들이 예니를 어떻게 알아?”
“아주 잘 알던데요? 클래식이든 뭐든 안 가리고 일단 어리고 예쁜 애들 있으면 다 정보 가지고 있나봐요.”
나는 예니가 “나도 아이돌이에요.”라고 말하면서 예진이가 아이돌 된 것을 마땅치 않아하던 나를 다그쳤던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일하는 분야와 영역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여성에겐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예니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쌤은 이제 아셨네요? 예니가 단숨에 거절해서 묻혔지만, 예니한테 아이돌 영입 제안 들어왔던거 아세요? 한 두번이 아닐걸요?”
“뭐라고?”
“유노이아 성공하면서 경쟁사들은 이른바 ‘고급진’ 아이돌 감 찾느라 혈안이 되었어요. 걸핏하면 무대에서 피아노 치는 하린 언니 보고 예니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엔터사 문 닫아야죠.
보세요. 딱 봐도 아이돌 상을 한 열 다섯 살 소녀가 트리오의 센터 자리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어요. 이게 그 사람들 레이더에 안 들어갔을거라 생각하셨어요? 예니가 워낙 단호하게 거절하고 아무한테도 말 안했을 뿐이에요.”
“예니가 그 얘기를 나한테는 안하고 너 한테는 다 했다고?”
“죄송해요. 네. 그랬어요.”
나는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아, 어쩌자고 예니를 중학교 1학년 때 데뷔시켰을까?
만약 중1 짜리 여자 아이가 걸그룹에서 춤을 춘다면 나는 틀림없이 분노했을 것이다. 그런데 클래식이니까 다르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내 딸이 신동이라는 우쭐거리는 마음에 도취되었다.
나는 그 어리고, 너무도 예쁜 아이를 수백, 수천 개의 시선이 꽂히는 무대 위에 세워놓고도 사람들이 그 아이의 예술을 감상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 눈빛 속에 섞인 위험한 욕망과 대상화의 냄새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나는 예진이는 물론, 예니마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니는 지금 나와 살지 않는다.
스무 살 되던 해, “공부를 더 깊이 하고 싶다”며 이미 합격한 예종에도 등록하지 않고, 트리오를 함께 하는 로사와 마리의 집이 있는 런던으로 가겠다고 했다.
런던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게 예술을 향한 열정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건 탈출이었다. 나로부터, 이 나라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음악의 신동’이라 부르면서도 정작 첼로가 아닌 얼굴에 쏠린 수많은 어른들의 시선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나는 그걸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기분도 그런데, 자리 옮겨요.”
예진의 목소리가 나를 회한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렸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그만 굳어버렸다.
어느새 열 명은 족히 넘는 손님들이 슬금슬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예진을 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순간 예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중앙으로 가더니, 사람들을 향해 손을 모으고 정식으로 인사했다.
아예 대 놓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예진을 보며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박수를 쳤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기도 했다. 그러자 예진이가 이런 저런 포즈를 취했다. 심지어 샤오룽바오까지 나왔다.
“자, 쌤, 이제 가요.”
예진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예진은 마지막까지도 당당히 손님들을 향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그렇게 우리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몇 명 안될 때는 눈빛만 줘도 되는데, 이 정도 되면 아예 ‘그래요. 저, 지니에요.’ 하고 나서서 포즈 잡아 버리는게 나아요. 그래야 이상한 사진 안 찍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