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성격은 상담이라기보다 경청에 가까워졌지만, 예진이는 여전히 우리 만남을 ‘상담’이라 부르길 고집했다.
퇴직을 눈앞에 두고 시작했던 지난 겨울의 상담이, 어느덧 봄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었다.
뜻밖에도 예진이가 SUV를 몰고 나타났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예진의 차림은 단정하고 포멀하면서도 은근히 고급스러워 젊은 여성 CEO를 연상시켰다. 여느 때와 달리 마스크 대신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저 고급스러운 착상과 선글라스를 보니 월 400여만으로는 확실히 감당이 안되겠다 싶어 한 마디 던졌다.
“차 살 형편 아니라며?”
“빌렸어요. 오늘은 밖에 좀 나가요. 블루밍 데이잖아요?”
예진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괜히 농을 걸었다.
“혹시 오해라도 받으면?”
그러자 예진이가 씩 웃었다. 굳이 나의 이분법을 들이대자면 김예진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주로 지니가 나를 응대하고 있었다.
“쌤 차에 제가 타면 몰라도, 그 반대는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중년 남성 차를 타고 가면 스캔들, 중년 남성을 차에 태우고 가면 아니다?”
예진이가 비교적 덜 ‘위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찍혀도 ‘지니, 알고 보니 효녀’ 정도? 아니면 ‘운전 연습 시켜주는 매니저?’ 뭐, 둘 중 고르세요. 효녀냐 매니저냐.”
“기왕이면 효도 받는게 좋지.”
나는 웃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스피커에서 ‘블루밍 데이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 가려고?”
예진이 핸들을 가볍게 돌리며 대답했다.
“두물머리.”
“특별한 이유라도?”
“예쁘잖아요? 첫 뮤비 찍었던 곳이기도 하고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11월이라 추워지던 때였는데, 양평 쪽은 또 얼마나 춥게요. 쌤 사회시간에 배웠잖아요? 양평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추운 곳 중 하나라고.”
예진이 몸을 으스스 떠는 시늉을 했다.
“그 추운 데서, 교복 춘추복 차림으로 야외 촬영했어요. 교복은 춘추복이 제일 예쁘잖아요? 으으.”
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마스크 안 쓰고 선글라스 썼어?”
예진이 운전대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돌려 웃었다.
“역시 예리하셔요. 벌써 이상하다고 느끼신 거에요?”
“평소랑 다르니까.”
내가 짧게 답하자, 예진이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마스크 쓰고 다닐 때는 정말 나 알아보지 마세요 모드고요. 선글라스 쓸 때는 나 알아봐도 돼요 모드죠. 대충 그런 차이예요. 요즘 기아에서 시승차 빌려 타고 다녀요. 몰카 좀 찍혀주는 게 렌트비 대신이죠.”
나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지만 예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근데 얼굴 다 내놓고 다니면 너무 티나잖아요. 광고 노출 티 팍 나버리면 오히려 역효과라서요. 연예인은 무대 밖에서는 가리는 시늉은 해줘야 ‘리얼’ 느낌 나거든요.”
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아, 그럼 혹시 나도 그 간접광고에 동원된 엑스트라야?”
그러자 예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따지면 전략적으로 배치된 조연이라고 해 드릴게요.스포티지는 막 사회적으로 성공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차니까. 오늘은 제가 아빠 모실게요, 이 컨셉 딱이거든요. 쌤은 세상이 기억하고 있는 ‘지적인 아이돌 지니의 아버지’로 떠올리기 딱 좋은 이미지고. 같이 사진 찍히면 좋죠. 기아에서 쌤까지 같이 나와서 CF찍자고 할지 몰라요. 퇴직금에 보태세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진짜 프로다. 너무 프로야.”
문득 2년 전, 예진이 출연했던 기아차 광고가 떠올랐다.
밤늦은 시간, 깜깜한 도심 속에 단 하나 밝게 빛나는 스튜디오. 그곳에서 땀방울이 튀도록 춤을 연습하는 지니.
그러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며 허전한 표정을 짓는다.
다음 장면. 정글 그린 색 스포티지가 고속도로를 달린다. 동해로, 푸른 해안선을 따라. 그리고 정동진역 근처로 보이는 곳에서, 붉게 물든 바다를 배경으로 춤을 추는 지니.
멘트는 거의 없었다. 풍경과 몸의 언어만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광고였다.
하지만 나는 그 광고를 보며, 새 SUV에 대한 구매욕 보다 늦은 밤까지 운동했는데 밤새 동해까지 운전하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광고일 뿐 당연히 예진이가 밤새 동해까지 운전하지는 않았음을 알면서도.
“아이, 쌤. 미안해요. 농담 했어요. 버릇없게. 제가 어떻게 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겠어요? 화나신 거 아니죠?”
“괜찮아. 뭐 그 정도 가지고.”
나는 담담히 대답했지만, 갈수록 김예진보다 지니가 주로 나타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좌회전을 하기 위해 예진이 핸들을 돌리자, 자켓 소매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빛에 반사된 하얀 팔뚝, 그리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보이는 세 줄의 흉터. 모두 깔끔하게 그어진 직선.
사고로 생긴 게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차창 너머로 스쳐가는 봄 풍경이 한순간에 잿빛으로 변하고, 스피커로 들리는 블루밍 데이즈가 마치 글루밍 데이즈 처럼 들렸다.
예니가 영국으로 떠난 뒤 쓸쓸했던 나에게 기적처럼 돌아온 예진이. 그런데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차가 다시 직진 경로로 들어서자 예진이 왼팔도 왼쪽으로 돌아가고 잠시 드러났던 흉터도 자켓에 덮여 사라졌다.
“쌤, 배 안 고프세요?”
예진이 목소리가 잠시 얼어있던 나를 깨웠다. 지니가 아닌 예진이 목소리였다.
어느새 차가 양수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도 얼른 분위기를 수습했다.
“내가 사줄게. 제일 먹고 싶은 게 뭐야?”
“햄버거.”
“의외네?.”
“데뷔 준비하던 때 생각이 나서요. 그때 정말 햄버거 하나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요. 저 뿐 아니라 언니들도. 이거 한 번 들어보실래요?”
예진이가 인포테인먼트를 몇 번 조작하자 경쾌한 비트가 들리더니 여성이 랩 치는 힙합이 들렸다. 그런데 내용이 차마 웃을 수 없었다.
6시 기상, 체중은 실검
몸무게 적힌다, 벽보에 실컷
눈물은 무칼로리, 배고픔은 실존
근데 나만 봤지, 냉장고 뒤편
초코파이 한 입, 눈물 젖은 간식
피자 박스 유물처럼 숨겨둔 자취
라면 냄새 난다? 나 아니야 선생님
하지만… 그 국물의 향기, 넌 못 속이지
금지야 금지 탄수화물 금지!
치킨도 햄버거도 우리랑 등져!
과자는 악마! 아이스크림은 적수!
근데 나한텐 위로였는데… 그거 먹지 마?
금지야 금지야 바나나도 반만!
한 조각 피자, 내 꿈을 삼켜
하지만 세이는 묻는다, “김밥은요? 그거 반칙이야?”
하린은 몰래 떡 하나 썰어
소이는 말 없지만 눈빛으로 울어
지니는 그냥 물만 마셔도 카리스마 뿜어
근데 세이는 말하지—“먹을 건 먹어야 춤이 되거든요?”
“이게 대체 무슨 랩이야?”
“세이 언니가 만든 ‘다이어트’. 첫번째 앨범 보너스 트랙이죠.”
“이런 거 까지 들려주는 거 보니 정말 간절한 모양이구나. 그럼 저쪽 주차장에 차 세우자. 건너편에 유명한 수제 버거집 있어.”
“네. 좋아요.”
예진이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려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이번에는 오른팔이 하얗게 드러났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쌤, 아시죠?”
“뭘?”
“저, 왼손잡이인거?”
“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예진이는 내가 왼쪽 팔목에 그어진 흉터 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한숨은, 슬픔이 아니라 안도의 한숨이었다. 왼손잡이가 왼팔을 그었다는 것은, 끝까지 살고 싶었던 거니까.
물론 그렇다고 안심해선 안된다는 것을 나는 많은 학생들을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를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