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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에 대한 단상

by 공감의 기술

과자 몇 봉지 사놓고, 친구 방에서 늘어진 테이프를 무한 반복으로 들으며 밤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불합리한 세상 부조리에 맞서고, 힘없는 서민의 아픔을 대변하는 마냥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새 울분을 토로했던 열정도 있었습니다.

길을 걷다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에 발걸음을 멈추고 음악이 끝날 때까지 레코드 가게 앞을 떠날 줄 몰랐던 감성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수줍게 꽃 한 다발을 바치는 용기도 있었고요, 비를 쫄딱 맞고 돌아다녀도 낭만이었습니다. 매서운 찬바람에도 반팔 티셔츠에 점퍼 하나면 충분했던 청춘이 엊그제 같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 꽃다운 청춘.

어리고 젊어서 뭐든지 다 흡수하던 나이입니다.

보는 장면마다 웬만하면 감동을 먹고 듣는 음악마다 짜릿한 전율을 느낍니다.

순수했던 마음처럼 피부도, 얼굴도 앳된 아름다운 젊음, 그 자체입니다.


인간들은 전쟁을 왜 하는지, 세상은 왜 가진 자들만 독식하는지, 모두가 다 공평할 수 없는지, 내 인생은 내가 자유롭게 살 수 없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 투성이었습니다.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힘없이 걸어가지만 마음만은 나는 어른들처럼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방학이 끝날 때면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놀라곤 합니다.

반팔도 더워 맨몸으로 지내다 쌩쌩 부는 겨울바람에 놀라 잘 입지 않던 외투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고 보신각 타종 소리를 들을 때면 '세월, 참 빠르다'라는 어른들의 푸념이 조금씩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계절은 때가 되면 알아서 모습을 달리하고, 일 년 365일은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나이를 먹어갑니다. 나도 모르게 늙어 갑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보신각 타종 소리도, 내 생일마저도

한 살 두 살 나이 들수록 연례행사이려니 무덤덤해집니다.


전쟁은 나라들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전쟁과도 같고,

가진 자들이 독식하는 세상이기에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애를 써야만 하고

공평한 건 하루 24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뿐,

인생은 출발부터 불공평하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현실입니다.


음악소리가 흘려 나오던 레코드 가게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꽃 한 다발을 갖다 바쳤다가 쓸데없는 곳에 돈 썼다며 야단 듣기 십상입니다.

찬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내의부터 찾아 입고,

소소한 감동을 느끼며 밤새 이야기 나누던 젊음은 꾸벅꾸벅 조는 아재가 되었습니다.


세파에 이리저리 시달리다 지쳐 마음은 무뎌지고 감각은 둔해졌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전율보다 먹고사는 일상에 정신이 팔려 있고 입에 풀칠하기도 바빠 웬만한 자극에는 감흥도 없습니다. 노쇠한 피부에는 주름살만 늘어나고 마음에는 굳은살만 배깁니다.

어느새 반백년이 된 지금, 몸과 마음에 박힌 굳은살은 요지부동입니다.

세상에 길들여진 건가요? 세파에 지친 걸까요?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깜짝 놀랍니다. 어깨는 처지고 자세는 당당하지 못해 누가 봐도 활기와 생기가 부족해 보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이라고는 담을 쌓은 표정인 거울 속의 주인공이 안쓰러워 보입니다.

노쇠하고 무덤덤함이 나이 듦의 자연스러운 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내야 할 날이 적지 않은 지금, '남은 날도 이렇게 늙어갈 건가'라는 물음에 '아니요'라고 외쳐봅니다.

나이 들면서 등한시했던 마음의 여유를 지금이라도 다시 찾으려 합니다.


적지 않은 나이까지 살아보니 내가 아등바등거린다고 다 잘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가끔은 기막힌 반전도 있고요.

세상 일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에 인생을 길게 보는 안목이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나이 듦은 어쩔 수 없다지만 몸은 튼튼하게, 설령 이 약 저 약 달고 살아도 마음만은 젊게 살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조금은 세련되게 살면 더 좋겠습니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요. 어렵지도 않습니다.

많이 움직이고, 자주 걷고. 마음껏 웃으라고 합니다. 먹는 것도 든든하게 먹고, 물도 자주 마시고 잠도 잘 자면 그게 몸이 건강해지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면역력이 강해지고 스트레스를 이겨내니 마음도 젊어집니다.

청춘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노화는 더디게 피부를 관리합니다. 이왕이면 몸매도 신경 쓰려고요. 옷 하나를 입더라도 맵시 나면 봐줄 만하지 않겠습니까?

사방에서 최신 기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뭐가 뭔지 몰라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기기들이 부담스럽고 배우기 어려울 것 같지만 각종 첨단 기기 사용법은 사실 요리보다 쉽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레 겁부터 먹지 말고 적극 배우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뭐든지 배워야겠습니다.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젊은 시절은 삶의 한 장면입니다.

실은 세상은 어떤 타협도 없습니다. 그저 흐르는 시간 안에 희로애락, 흥망성쇠를 다 안고 갈 뿐이죠.

백세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나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좋은 일을 기다리고 깜짝 놀랄 만한 근사한 순간을 기대합니다. 나이 들었다고 생기지 말라는 법 없으니까요. 그러려면 지금이라도 그 순간을 맞을 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이 듦은 자연의 섭리라 거스를 수 없겠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라면 스스로 젊음을 가꾸어 내야겠습니다.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열정과 감성을 흔들어 깨워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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