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한 통이 가져다준 '나, 형편없이 살지 않았어.'

by 공감의 기술

괜히 기분이 처지는 날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조건 반사로 출근을 하고 늘 가던 장소에서 늘 앉는 자리에 늘 보는 사람과 늘 고만고만한 일을 합니다. 해가 지면 늘 타던 차에 몸을 싣고 늘 오던 길을 따라 돌아옵니다.

재미있는 거리도, 속 시원한 일도 없는 그저 그런 밋밋한 하루가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되풀이됩니다.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잡념에 잠기곤 합니다.

늘 반복되는, 때론 지겹기만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집니다. 패기만만했던 청춘을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뭉쳐 다녔던 젊은 날의 친구들, 예전에 그렇게들 찾아대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다들 잘 살아는 있는지 궁금도 하지만 대개 이 질문으로 마무리됩니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지금 제대로 살고 있기는 한 걸까?'




며칠 전 퇴근을 하려는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지 10년도 훌쩍 지난, 대학 다니는 동안 줄곧 친했던 한 살 어린 후배였습니다. 처음엔 모르는 번호라 무심코 받았는데 후배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습니다. 격하게 반가움을 표현하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목소리나 말투가 예전 그대로인 것 같아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반가움도 갈수록 진해졌습니다. 혹시나 부탁할 일이 있는가 싶기도 하고, 설마 보험? 제품 판매? 투자? 이런 쪽은 아닌가 잠시 의심도 들었지만 후배는 그런 계열의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경조사 연락도 아니어서 뜬금없이 왜 전화했는지 이유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생전 연락 없던 후배는 용건도,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생각이 났다며 전화했답니다. 두세 다리 건너 우연히 발견한 제 연락처가 반가웠다나요? 처음엔 뭔 말을 할까 어색하고, 한편으로 뻘쭘도 했지만 점차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도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졸업하고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은 뭐하고 지내고 있는지, 아이는 몇 명인지 대화를 이어가다 둘이 서로에게 공통된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하는 건 똑같네'


'시간 되면 얼굴 한번 보자'라며 상투적인 말로 마무리하려는데 둘 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지금 코로나 이 시국에 그럴 일은 당분간 없지 않겠냐라는 재치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나이인데 아이들처럼 낄낄대며 나눈 대화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밋밋했던 일상에 기분 좋은 웃음을 한바탕 웃었습니다.

아무리 친했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난 터라 이유 없이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나 역시도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먼저 연락할 용기가 없었는데 이렇게 전화를 준 후배가 기특하고 너무 고마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그래도 아주 형편없이 살지는 않았지. 내가.'




다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살면서 가끔 이런 생각들 하지 않으세요?

'뭘 위해 지금껏 이렇게 발버둥 치며 살고 있나?'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제대로 살고는 있는 걸까?' 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그러면 예전에 친했던 사람들이 우선 떠오릅니다. 학창 시절 단짝이었던 짝꿍부터 항상 붙어 다니며 죽고 못 살았던 그런 친구들이나 친형보다 더 따랐던 선배, 동생보다 더 나를 따른 후배도 있을 거고요.

그렇게 함께 추억의 한 페이지를 멋지게 장식했지만 오랫동안 각자의 인생이 바빠 연락 한번 못했던 지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 판데믹이 우리를 힘들고 지치게 하지만 어쩜 지금이야말로 굉장히 좋은 핑곗거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너, 코로나 이 와중에 전화 한번 안 하냐?' 이런 소리는 들을 일이 없을 겁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차피 만나자는 약속은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야, 이 시국에 살아 있냐?' 하며 친구에게 생존 확인을 핑계 삼아 연락할 수 있고요,

'이 와중에 잘 지내십니까?'라며 지인에게 안부를 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로나가 해결되어 상황이 예전처럼 돌아왔을 때 하는 것보다 지금 하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다 같이 힘들 때 전화 한번 주는 거, 힘들 때 연락 한번 오는 건 기억에 오래 남으니까요.


전화번호 누르기가 망설여지고, 전화하려니 어색함도 있습니다. 뭔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할 말이 없어 뻘쭘할 것도 같습니다만 막상 연결되면 어색함은 잠시, 그 옛날 진했던 우정이 살아나 가슴이 터질 듯한 뿌듯함이 듭니다.

그저 그런 사이가 아닌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면, 마음이 척척 들어맞는 그런 친구였다면 한두 마디 대화가 우정을 타고 넘어 잊었던 추억까지 소환을 해주고요, 당장이라도 만나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10년 만에 내가 궁금하다고, 생각났다고 연락받으면 기분 좋지 않겠습니까? 그 기분 좋은 일을 내가 먼저 해도 좋을 듯합니다.

단 한 통의 전화로 지금 누군가의 '인생 제대로 살고 있나’ 하는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나 또한 기분 좋은 일입니다.


'나 형편없이 살지 않았어' 하는 기쁨을 주면서 자존감도 팍팍 올려 주는 한 통의 전화, 오늘 누구에게 이 기쁨을 전해줄까, 설레는 고민 속으로 기분 좋게 빠져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쩜 나를 생각하며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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