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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우보만리(牛步萬里)

우직한 소처럼 천천히 걸어서 만리를 간다

by 공감의 기술

토끼와 거북이 경주 이야기,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토끼가 거북이를 느림보라고 놀려대자 거북이는 열 받아서 토끼에게 달리기 경주를 신청하죠. 가소롭게 여긴 토끼는 경주를 시작하자마자 전속력으로 한참을 달려갑니다. 경주라고 하기엔 너무 싱거웠고 토끼는 보이지도 않는 거북이를 비웃으며 안심을 하죠. 그리곤 낮잠을 즐깁니다. 아시다시피 토끼가 낮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는 쉬지도 않고 기어가 토끼를 제칩니다. 뒤늦게 깬 토끼는 힘껏 달려가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승리는 예상을 뒤엎고 거북이가 차지합니다.

이 경주 이후로 토끼 하면 재능이 뛰어나지만 게으른 인간, 거북이는 재능은 별로 없지만 노력해서 성공하는 인간을 상징하게 되죠. 어린이 교육용으로 ‘천천히 하더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교훈은 지금도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우직한 소 한 마리가 길을 걷습니다. 네 발 달린 짐승이지만 빠르게 달리지 못합니다. 나무는 오를 엄두가 안 나고요, 헤엄은 칠 줄 알지만 주 종목은 아닙니다. 하늘은 난다는 건 상상에서나 있을 이야기이고요. 소는 그저 한걸음 한걸음 걸을 뿐입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한눈에 알아차리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 어디서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 말을 때와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외친다고 하죠. 바로 '빨리빨리'입니다.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는 양반 문화를 고집하다 나라를 잃는 설움을 겪었습니다. 살아도 너무 못 살아 하루라도 빨리 잘 살고 싶어 뭐든지 '빨리빨리'가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른바 빨리빨리 문화죠.

5초 정도면 알아서 닫힐 엘리베이터 문을 더 빨리 닫으려고 버튼을 여러 번 눌러요. 물을 붓고 3-4분만 있으면 되는 컵라면을 기다리지 못해 젓가락으로 몇 번 휘젓고는 설익는 채로 먹습니다. 택배 배송도 주문하면 24시간 이내 대문 앞에 와있습니다. 느긋하게 기다린다는 건 게으른 거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할 행동이라 무시합니다.

남들보다 더 빨리 돈 벌고 싶고 더 빨리 출세하고 싶습니다. 뭐든 남들보다 더 빨리 앞서 나가야 인생 잘 살았다는 인정을 받는 세상인 듯합니다.


뭐든지 빠르게 처리하고 빠르게 올라가면 인생이 편해지고 행복할 거라 믿었습니다만 인생을 살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술술 풀리는 날보다 뱅뱅 꼬인 날이 훨씬 더 많았고,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틀린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계획했던 것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요.

오늘은 힘들었지만 내일은 더 힘들 수도 있다는 현실도 자주 맞닥뜨립니다.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마냥 부러워하면서도 앞에선 미소를 짓고, 나보다 잘한 사람을 보며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뒤돌아서서 질투를 하고 어떻게든 따라잡으려 노력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러기보다 앞선 이를 끌어내리려고 온갖 술수를 동원하는 인간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생기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을 우스개 소리로 넘기기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인생은 빠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배우게 됩니다.

빨리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빨리빨리 사회가 주는 편리함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열광을 하고 그래서 뭐든 빨라야 살아남는다고 믿습니다. 언제 어디든지 빨라야 인정받고 빠르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아 오늘도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달립니다. 결국 가랑이가 찢어져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아픔을 당합니다.


빨리한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었고 빨리 끝났다고 다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빨리하고 나면 또 다른 일거리가 내 앞에 놓이고, 빨리 끝내고 나면 급하게 먹은 음식이 체한다고 숭숭 뚫린 빈틈과 실수가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한다고 끝난 게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연이어 생기기도 하고요, 빠르게 달려간 길이 영영 빨리 가버린 길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과 조직에서 남들보다 빨리 승승장구하며 앞서가는 사람이 반드시 승리의 미소를 짓는 것도 아니었고요, 남들보다 빨리 출세한 사람이 성공 가도를 쭉쭉 달리지도 않았습니다.


천하의 명마인 천리마도 한 번 뛰어 열 걸음을 갈 수 없습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내디뎌야 하고 한 줌의 흙을 쌓여야 탑을 쌓아갑니다.

티끌이라도 모아야 태산이 되고 한 페이지를 적어야 한 권의 책이 탄생합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빨리 오르면 더 빨리 내려가야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특출한 능력보다는 오히려 열정과 신념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시련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모진 고난에 힘들어도 자신의 삶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자신만의 원칙과 기본을 잊지 않고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가다 보면 어느덧 결승선을 제일 먼저 통과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노력을 하는 하루하루가 쌓여 일 년 365일이 되고 꾸준한 전진이 최후의 승자를 되게 합니다.


우직한 소 한 마리가 느릿느릿 더디게 걷습니다.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육중한 몸이지만 한걸음 또 한걸음 쉼 없이 걸어갑니다. 뚜벅뚜벅 가던 걸음이 어느새 우리나라 삼천리보다 훨씬 많은 만 리를 걸었습니다.

우직한 소가 묵묵히 자신의 걸음으로 만 리를 걷는다는 우보만리, 인생은 장거리 승부이지 결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는 교훈을 얻어 갑니다.


세상은 원래 한 번에 딱딱 들어맞지 않습니다. 틀리면서 배워 나가는 것 또한 인생이고요.

생각만큼 잘되지 않는 인생입니다. 그래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합니다. 우보만리의 자세로 묵묵히 가다 보면 꾸준함이 재능을 앞서는 날을 맞이합니다. 그 또한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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