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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Mar 05. 2021

항상 제멋대로인 평생의 친구, 어쩌면 좋을까요?

기억

평생 친구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떨어져 본 적 없는 녀석입니다.

이 친구와 즐거움과 기쁨을 같이 나누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정말 제멋대로인 녀석입니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을 때도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뜬금없이 찾아옵니다.

예전에 했던 실수나 좋지 않은 일을 일부러 끄집어내어 사람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하고요.

잊을만하면 불쑥 나타나 내 곁에 달라붙어 옴짝달싹하지 않습니다.

삶이 지쳐 힘들 때 위로는커녕 오히려 화를 돋우고 열불 나게 만든 적도 있습니다.

평생 친구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위주이면서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진짜 엉터리도 이런 엉터리도 없다 싶을 만큼 어디로 튈지 모를 녀석입니다.


이 친구를 대하고 있다 보면 어이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좋았던 일이나 중요한 사건들을 다른 사람이 아는 사실과 전혀 딴판으로 알고 있어 당황스러울 때도 많았고요. 별일 아닌 일을 엄청 부풀려 사람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없는 사실을 그럴싸하게 꾸며내 그걸 미리 알려준다면서 말해주곤 합니다.

먹고살기도 버거운데 어제는 이 걱정, 오늘은 저 걱정. 걱정거리만 한 아름 던져주곤 내몰라라 휙 가버립니다.

속상한 일을 당하면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데 이 녀석은 자꾸만 생각나게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합니다.


평생의 친구에게 불만을 쏟아냅니다.

항상 지 마음대로인 이 친구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내 앞에서 꺼지라고 소리쳤지만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안 볼 거라며 이불 킥을 날리고 분노의 양치질을 하며 증오를 퍼부어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축소하거나 과장하다 못해 왜곡할 때가 너무 많은 녀석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넌 네가 필요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을 조작하잖아. 그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이유야.'


이 친구를 잊으려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으려고 혼자 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고 딴짓을 하며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이 녀석은 그때만 잠시 숨는 척할 뿐,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내킬 때면 머리를 들이댑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분노의 게이지는 한계치를 훌쩍 넘겨버립니다.


이 녀석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옆에 있었다고 합니다. 내 생각에는 아주 짧게 4-5살 정도에 처음 만난 것 같은데 확실치가 않습니다. 그리곤 줄곧 나를 따라다닙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 녀석도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나 봅니다. 청춘을 지나면서 조금씩 깜빡깜빡하더니 갈수록 심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는 몇 년 동안 고생 고생하면서 배운 것을 얼마 지나지도 않아 몽땅 잊어버리게 하는 재주를 부려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나한테만 그런 줄 알았더니 이 친구는 이 사람, 저 사람한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드물게 어떤 사람과는 즐겁고 기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숨만 쉬며 녀석에게 맨날 좌지우지됩니다.

벗어나고 싶은데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녀석은 내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사람 환장하겠습니다.  


평생을 알고 함께 해온 친구이지만 항상 제멋대로인 이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요?

혹시 주위에 녀석과 같은 친구를 둔 적 없으신가요?

이름부터 공개하겠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아실만한 녀석이니 다들 주의하세요.

평생의 친구 이름은 '기억'입니다.  




평생을 함께해 온 친구지만 늘 아름다운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온 날이 쌓일수록 지난 모든 일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근사하게 포장해 사람 마음을 짠하게 만듭니다.

삶이 계속될수록 가장 행복했던 기억만 소환하려고 합니다. 근데 이 녀석은 행복한 기억에는 약간의 과장도 허용해 주니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습니다.


오늘도 평생의 친구와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입니다.

괴롭힐 때는 여전히 '야! 이제 그만! 좋은 것 좀 주라고!'라며 투정을 부리고요, 친할 때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추억 속에 푹 빠져들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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