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치조림, 고등어조림, 가자미조림. 각종 조림 요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생선입니다.
소고깃국, 황탯국, 어묵국. 수많은 국 요리 역시 간판으로 내걸린 재료가 메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의외로 거기에 조연으로 들어간 이것을 더 좋아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이 채소는 다른 재료를 받쳐주며 맛을 진하게 우려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빠지지 않습니다.
조림, 국뿐 아니라 탕, 찌개는 물론 여러 샐러드, 냉채, 숙채, 볶음요리, 튀김 요리 가리지 않습니다. 김치와 깍두기, 단무지, 장아찌도 마다하지 않고 등장합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어떤 재료와도 잘 어울리며 받쳐줍니다.
관심을 갖고 보면 우리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채소,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내며 계절에 따라 다른 맛을 갖고 있는 무입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옛날, 막힌 속을 확 뚫어줄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면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해 주려고 어디선가 시뻘건 흙이 묻은 팔뚝만 한 무 하나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냥 먹어도 시원하고 요리해 먹어도 시원한 무, 게다가 달달하기까지 합니다.
'무우'라고도 부르는 '무'.
무는 배추, 고추, 마늘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4대 채소 중 하나입니다. 무가 제철인 계절은 겨울, 예로부터 먹거리가 귀했던 겨울을 굶주리지 않게 도와준 중요한 채소였습니다.
익히지 않고 먹으면 아삭하고 오독 거리는 식감입니다. 불에 익히면 부드러워지고요. 국물 요리를 할 때 무는 국물 맛을 깔끔하게 하고 다른 재료와 여러 양념과도 잘 어우러져 맛을 배가시켜 줍니다. 그래서 국물이 들어가는 요리에는 웬만하면 다 어울린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고기나 생선을 찜이나 조리로 요리할 때 무는 빠지지 않습니다.
고등어, 갈치 같은 생선은 비려서 싫어하는 아이들도 무를 같이 넣고 조리하면 양념 맛은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비리지 않아 잘 먹기도 합니다. 마치 달고 고소하고 식감이 부드러워 푸딩 먹는 느낌이 납니다.
익혀서 먹는 무는 단맛이 나서 맛이 좋고 소화도 잘 되어 일석이조입니다.
또한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느끼함을 줄여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치킨을 시키면 따라오는 치킨무, 고기에는 쌈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작고 얇게 썰어서 말려 먹는 '무말랭이'도 무의 작품입니다.
생무, 익힌 무와는 또 다른 꼬들꼬들한 식감이 입맛을 사로잡습니다. 양념이 제대로 된 무말랭이는 눈 깜짝할 새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밥도둑이라고 합니다.
우리 식탁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무는 다양한 영양소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비타민 C가 많이 들어 있는 무는 겨울철 비타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무에 함유된 메틸 메르캅탄 성분은 세균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어 감기 예방에 좋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는 콜레스테롤을 배출시키는 효과가 있어 각종 성인병 예방에도 한몫합니다.
예로부터 체할 때면 마셨던 동치미 국물, 무에는 탄수화물을 소화시키는 효소인 다이스티아제가 들어있어 소화 기능을 개선해 주기 때문입니다.
무는 수분 함유량이 높아 숙취의 원인이 되는 성분을 배출시키고 탈수 증상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어 숙취해소에도 좋습니다.
섬유질도 많아 변비 예방에도 도움이 되는 무는 100g당 13칼로리의 저칼로리 채소로 열량은 낮고 포만감은 커 다이어트에도 적합합니다.
별다른 비료 없이도 아무 곳에서 나 쑥쑥 잘 자라는 무는 이래저래 참 고마운 채소입니다.
그런 무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예전 급식비리가 극심한 학교에서는 카레에 감자 대신 무를 넣었다고 합니다. 감자보다 싸고 양도 많은 무가 카레에 들어가 익으면 감자인지 무인지 생각 없이 먹으면 알아채기 힘드니까요. 그래서 엄청난 배신감을 몰고 온 채소이기도 합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친 인간들 때문에 애꿎은 무만 야단을 들었습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무가 들어간 속담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속담입니다. 그 많고 많은 채소 중에 왜 하필 무일까요?
무는 단단하고 굵기도 적당해서 칼로 베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딱 좋은 채소입니다. 대나무와 짚단과 함께 자주 베이는 물건 중 하나였다고 전해집니다.
허풍 떠는 남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속담의 진정한 뜻은 어떤 일이든 포기하는 것보다 작은 결과라도 보여주는 게 낫다는 의미입니다. 허공이나 빈 도마에 칼질을 해봤자 체력적으로 힘만 들고, 경제적으로 무의미하고, 보기에도 볼품없으니 하다못해 무라도 썰어 뭐라도 건져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겨울은 무가 맛있는 계절, 잘 생긴 무 하나를 손에 들고 어떤 요리로 어떤 맛을 내어볼까 한껏 욕심을 부려도 보고요, 길게 시원하게 생긴 무 하나면 다른 재료가 마땅히 없어도 뭇국 하나로 저녁 메뉴의 고민을 덜기도 합니다.
아무 곳이나 쑥쑥 잘 자라는 무, 국이나 찌개, 무침과 김치 아무 조리법이나 다 받아들이고 심지어 바닥에 깔려주는 포용력도 군말 없이 발휘합니다.
참 많은 장점을 가졌으면서도 모두를 다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가진 무, 흔해빠진 무가 새삼 달라보입니다.
무를 먹을 때마다 무 같은 포용력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더 달달하고 더 시원하고 더 재미난 맛을 내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무에게 한 수 배우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