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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차중 May 26. 2024

돌담길 따라 걷는 사리 마을

신안군 흑산도 사리 마을에는 고려시대 양식의 옛 담장이 있다. 거센 바닷바람을 견디기 위해 안팎의 담장을 엇갈리게 하여 쌓은 양식이다. 나지막한 이 담장은 2006년 국가 등록문화재 제282호로 지정되었다. 낮은 담장과 함께 사리마을을 걷는다. 

흑산도의 지붕은 관청의 미관정책으로 지붕이 빨갛거나 파랗다. 이곳 사리 마을은 아직 그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그만큼 사리는 섬 안에서도 오지 마을이다. 

자산어보를 지은 정약전의 첫 유배지는 우이도였다. 우이도는 육지에서 흑산도 거리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도 드문 작은 섬에서 먹을 것도 없고 생활하기에 어려움을 느낀 정약전은 4년 후 더욱 멀리 있는 섬 흑산도로 옮겨간다. 그는 사리에 터를 잡고 사촌서실(沙村書室)이라는 현판을 내건다. 마을 사람들은 잡아 온 물고기로 학비를 대신하고, 약전은 가져온 물고기가 궁금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를 편찬하기에 이른다. 자산은 약전의 여러 호 중의 하나이다. 오직 검다는 흑(黑) 자를 선택한 것보다 무성해서 검다는 자(玆) 자를 사용하였다. 강진에서 유배 중인 동생 정약용에게 보낸 서신에 흑산이라 적으면 흑산에서의 삶이 더욱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촌서당과 공소를 오갈 수 있는 돌담길

사리의 돌담은 무엇을 가리거나 막기 위함이 아니다. 기울어진 땅을 부여잡고 길을 내어주기 위함이다. 돌담을 따라 공소로 들어섰다. 이름 모를 야생화밭을 지나 우물을 발견했다. 공소가 설립된 초기에 만든 우물이다. 두레박으로 물을 올려 한 모금 들이켰다. 골짜기 약수의 맛과 다르지 않다. (한참 후에 서당 안내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마시는 것을 그리 권하지 않는다고 한다. 후에 물 탈은 없었다.) 정약전이 마셨던 물일 것이며, 또한 이곳 1958년에 지은 공소를 드나들던 신도들의 성수로 쓰인 물일 것이다.

성당은 시멘트와 호박돌로 외벽이 장식되어 있고 포탄의 피로 만든 종이 걸려있다. 현관문과 십자가 사이에는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지금도 토요일에는 마을사람들이 찾아와 미사를 드린다.


공소 바로 위에는 사촌서당이 있다. 복성재라 쓰여있는 대문을 통해 초당으로 들어섰다. 자산어보가 집필된 현장에 온 것이다.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한 현판이 걸려있다. 어류에 통달한 어부 장창대, 흑산도에 딸린 작은 섬 대사도에 가려다 배가 풍랑에 휘말려 일본을 지나 필리핀까지 다녀온 문순득, 정약용이 그의 형에게 가서 학문을 배우고 서로의 소식을 전하라고  보낸 정약용의 제자 황상이 드나들던 곳이다.  

 돌담길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초당 아래로는 바다와 마을 너머 학생의 발길이 끊긴 사리분교가 보인다. 공소 아래 유배문화공원을 찾았다. 1693년 해괴한 짓으로 유배해 온 '정숙'이라는 나인부터 1898년 뇌물수수로 유배해 온 '김홍록'까지 기록된 유배인 도표가 있고, 일본과의 통상을 반대하다 유배해 온 최익현을 비롯한 위인들의 비석이 있다. 

정약전이 신비로운 물고기를 맞이하던 사리 포구에 들렀다. 포구 앞에는 칠 형제 바위가 줄지어 있다. 동남풍이 불어도 일곱 개의 바위섬 때문에 배들이 정박할 수 있다. 홀어머니가 일곱 형제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풍랑에 물질을 하지 못해 아들들이 물속에 들어가 두 팔 벌려 파도를 막다가 바위로 굳어졌다고 전하는 칠 형제 바위이다. 

많은 유산과 이야기가 숨어 있는 작은 마을. 정약전이 마을에 왔을 때 들썩였던 것처럼, 이 포구에 마을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차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칠 형제바위와 사리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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