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귀국행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
그렇게 '엄마 나 다녀올게'라는 한마디로 시작된, 나의 첫 번째 여정은 유럽, 아프리카, 남미, 중미 대륙의 여러 국가들을 거치며 생각보다 조금은 길게, 어느덧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난 어느덧 서른넷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새롭고 낯선 공간들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생활하는 사이 나는 그들의 삶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에 자연스럽게 물들어갔고 처음 경험해보는 이전과는 다른 삶 속에서의 내 인생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의 시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일 년이라는 시간이 코 앞까지 다가 올 무렵
멕시코 칸쿤에서 한가로운 아침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핸드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좋지 않다.
"엄마,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라는 나의 물음에
우물쭈물 기어들어가는 듯한 나지막한 엄마의 목소리.
"그냥 사고가 쫌 있었어..."
"응? 사고? 무슨 사고?"
순간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가 멕시코 칸쿤을 오기 전 쿠바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자주 연락을 못하던 그때,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고속도로에서 큰 교통사고가 나셨다는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다 잘 끝났고 그렇게 한 달을 입원하고 퇴원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불효녀인 건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내가 불효녀인 게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에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부모님은 아파 누워계실 동안에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좋다고 놀고 있었던 게 너무 죄송스럽고, 이런 못난 딸이 걱정할까 봐 이야기조차 하지 않은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 더 죄송스럽다.
이미 난 내 삶의 무게의 중심을 ‘나 자신’으로 두고 결국엔 ‘나’부터 생각하는 못된 딸임에도 원래 해외에 있으면 없던 효심까지 생기는 터라 지금은 더 이런 나 자신과 나의 선택에 따른 현재의 상황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든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Go 해야 하나?
물론 이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회복만을 남겨두신 상태이지만 부모님 두 분 다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집안일을 하시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일단은 오늘내일 일정을 모두 스톱한 후 찬찬히 생각해본다.
먼저 비행기표를 알아보자. 하필 연말이라 남아있는 표는 거의 없고 당장 다음날 아니면 다음 달 초에나 갈 수 있다. 사실 다음 달 초에 가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 판단되니 그렇다면 나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권이 있다.
1. 이렇게 내일 당장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2. 아니면 그냥 이대로 내 여행은 Go 하는 것.
결정 장애인 내가 불과 몇 시간 안에 이 중요한 걸 결정해야 하는 이 상황이 야속하기만 하다. 나에게 주어진 반나절의 시간 동안 난 더 복잡하게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사실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불효녀’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결국엔 그저 내 마음이 더 편한 쪽으로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이대로라면 이후의 계획을 실행한다고 해도 그곳에서의 내 마음은 편치 않을 것만 같다.
사실 어쩌면 난 이렇게 부모님을 보러 돌아가야 내가 덜 나쁜 딸이 될 것만 같아서,
이제라도 부모님이 걱정되어 돌아가는 덜 나쁜 딸이 되고 싶어서,
그로 인해 내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얻고 싶어서,
그렇게 결국엔 나는 또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편한 선택이지만 한편으로는 어쨌든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부모님의 마음 또한 편하실 것이라는 나만의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그래, 일단 지금은 돌아가자.
이후에 다시 돌아올지 말지는 일단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서 더 이상 어떤 것도 더 내 머릿속에 들어올 수는 없다.
그렇게 나는 그냥 다음날 멕시코 칸쿤에서 출발하는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어버렸다. 마지막 저녁식사는 타코로 정하고 집에 가져갈 소소한 기념품을 사기 위해 부랴부랴 근처 마트로 가본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주변 정리를 마친 나는 나의 기나긴 여행의 진짜 마지막 밤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인간은 참 간사한 동물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아침 일찍 일어나 호스텔 조식을 먹고 플라야 델카르멘 해변가로 나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잔잔하게 파도치는 파란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난다.
정말 '인간'이라는 동물은 참 이기적이고 간사한가 보다.
나 또한 인간인지라 그 간사함을 피해 갈 수는 없나 보다.
막상 한국으로 돌아가는 표를 끊고 나자 부모님에 대한 걱정보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나에게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불효녀라며 책망하던 나는 또 어디로 가버렸는지 막상 결정을 내리고 나자 또다시 오롯이 ‘나’부터 생각하게 되는 그 이기적인 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아직도 미성숙한 나 자신이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하다.
기나긴 여행을 하며 분명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종종 있었다.
다시 여행을 즐기고 다시 앞으로 있을 새로운 여행 일상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넘치던 때였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어디에서 어떻게 보낼지, 이번 새해는 어디에서 어떻게 보낼지, 그 이후에는 어디에서 어떤 일상을 보낼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정했던 나의 계획들로 설레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나에겐 지금 이 곳에서 이렇게 끝낼 수 있는 여행이 아니다.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하자 그냥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슬프게만 느껴진다.
세상 일이라는 게, 인생이라는 게 하루하루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그렇기에 퇴사를 결심했고, 그렇기에 이러한 내 인생에 있어 너무나도 값진 여행을 하며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걸 인지하고는 있으면서도 이렇게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닥치게 되자 이 상황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나를 보며 ‘나도 어쩔 수 없는 하나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떠날 곳이 아닌데
이렇게 끝낼 여행이 아닌데
아직 못해본 것도, 해야 할 것도 너무 많은데
아직 내 여행은 끝나지 않았는데
그냥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지는, 이러한 내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다. 누군가 나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 눈물이 와락 터져 나올 것만 같다.
그냥 내가 그려나가던 이 삶이 예고 없이 반강제적으로 끝나버려서
그게 오롯이 나의 의지와 판단에 의한 끝이 아닌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따른 내가 원하지 않는 끝이라서
그래서 그냥 나에게 벌어진 이 상황과 현실에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
마지막 이어서일까.
특별히 아름다운 바다는 아닌데 여태껏 봐왔던 그 어떤 바다보다 유난히 더 아름다워 보인다.
아름다운 바다를 뒤로 한 채 헤진 배낭과 캐리어와 함께 떠나던 길에서도
칸쿤 공항을 가는 버스 안에서도
경유지인 LA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목적지인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어서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돌아오게 되어서
내 머릿속에서는 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한국을 정말 돌아가는 것인지 아직도 실감조차 나지 않는다.
한국을 돌아가는 기분도, 그렇다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하는 기분도 아닌, 그냥 여태껏 겪었던 수많은 여정 중 하나처럼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모르는 그 어디론가로 이동하는 기분이다.
끝난 듯 끝나지 않은 듯한 내 여행의 끝
그렇게 여행을 시작한 지 정확히 딱 1년째 되던 날
그렇게 나의 기나긴 첫 여정의 1부는 막을 내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