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국주 Apr 29. 2021

내 남자의 취향

知彼知己 百戰百勝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도대체 저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아?”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너는 그의 어디가 그리 좋아서 그렇게 쫓아다녔느냐고.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주구장창 말해오지 않았는가. 나는 단연코 그가 잘 생겨서 쫓아다녔다. 착해서? 성격이 좋아서? 예의상으로라도 그딴 소리는 못 한다. 착한 사람이랑은 친구까지만 해도 된다. 인성?? 내게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고 검토된 적도 없으며, 지금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니, 일단 그게 검토가 가능한 지부터가 의문이다. 사람 인성은 절대 모른다.


더불어 그가 나를 받아준 이유도 중요하지 않았다. 애당초 몰랐고, 지금도 모르며 궁금하지도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고, 내게 중요한 것은 미래였으니까…


하여 진짜로 중요한 것, 바로 그의 이상형이었다.

그의 이상형, 그의 취향… 나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했다. 知彼知己百戰百勝(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를 알고 너를 알면 절대 패하지 않는다.


그의 이상형, 그 안에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노력을 해야 하는지, 그 길이 모두 들어있는, 즉 나의 백전백승을 위한 병법서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와의 관계는 신호등 없는 일방통행의 고속도로였다. 결코 쌍방이 아니었다. 하여 의도치 않게 대량의 정보 출하만 있었을 뿐 입하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실로 답답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너의 이상형은 무엇이냐 대놓고 물어봤자 그가 고분고분 대답해줄 리도 만무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선배님은 여자 연예인 중에 누가 젤 좋아요?


질문의 중량을 한없이 가볍게 만든 것이다.

정말 세상 쓸모없고 하찮아 보이는 이 질문… 이 질문의 대답 속에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물론 한방에 고급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나는 비비고 꼬아가며 시간차를 두고 하찮은 질문들을 여러 번 던졌고, 그 역시 쓰레기 던지 듯 답들을 던져줬다. 나는 그가 던진 쓰레기들을 소중히 모아 꼬깃꼬깃 다시 펴서 적절하게 거르고 취합해서 결론을 냈다. 그렇게 그의 이상형을 추출해 냈는데… 그렇게 나온 결과는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상이었다. 젠장…


포기하지 말자.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확실한 이상형이 있다는 사실은 호재였다. 목적지를 모르거나, 목적지가 없다면 곤란하겠지만, 그 목적지만 확실하다면 그 여정이 아무리 험할지라도 완주는 가능하다. 어떻게든 도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때 하필 시시적절하게 그가 준 첫 선물은 바로 옷이었다. 그것도 쫙 달라붙는 하이웨스트의 h라인 정장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 아, 가죽 하이힐까지 있었으니… 그 입장에서는 꽤나 솔직한 선물이었고,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난도 아이템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나는 양아치와 백수를 혼합한 생날라리같은 상태였으니… 그 깔끔한 투피스 정장을 본 순간…  아… 김국주… 앞으로 갈길이 멀겠다.


자, 상상해보자.

내 애인이 내 스타일과는 정반대인 스타일의 옷을 내게 선물했다. 아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것이다. 하지만 이때,


 ‘이 자식이 그동안 내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었나?’


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하수다.

그가 이 난해한 아이템을 구할 때 거쳤을 과정을 한번 상상해보자. 그는 이 물건을 구입하면서 결코 만 쓴 것이 아니다. 선물을 고르고 고르고 또 고르고 취소하고 또 구입하고 또 취소하고 다른 걸 구입하고… 이 짓을 하는 시간만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더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 혼자서 여성복 매장을 들어가는 용기... 이거 상상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런 도박 같은 짓을 했을 때 우리 관계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믿음. 그리고 이 선물을 건네는 그 손의 창피함까지 감수한 것이다. 더불어 내 사이즈를 알아내는 주도면밀함…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지? 뭐 어쨌든... 이런 과정들을 생각하면 이런 한여름에 핫팩 같은 선물을 받아도 마음이 관대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와우! 맘도 착하고(?) 잘생긴 내 애인이 나한테 이런 숙제 같은 선물을 줬네? 이거 참 고맙네.”


라고만 생각한다면 이 또한 중수이다.

그는 애인의 첫 선물로 안전이 보장된 무난한 아이템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쓸데없는 노력과 정성을 쏟아 실패 확률이 요동치는 이런 비트코인 같은 종목을 선택한 것이다. 그가 준 이 물건은 단순한 착용 아이템이 아니다. 이것은 내게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같은 것이다. 즉 진짜 병법서란 뜻이다. 이 난해한 물건 속에서 나의 목적지, 나의 갈 길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고수이다.

 

그래서 백화점으로 갔다.

대충 감을 잡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적당한 곳에 들어가서 패기롭게 구입했다. 뭐… 과정 중간중간에 다소 어려움은 있었지만… 도대체 왜때문에 점원들이 나에게 정장치마를 추천해주는 것을 망설였는지 지금도 참 의문이다.


그런데 막상 옷을 구매하고 나니 바라보고만 있어도 불편한 이런 걸 입고 그의 앞에 서기가 문득 부끄러워졌다. 숨도 안 쉬어지며 조금만 방심하면 붕어처럼 되는 내 배에도 지속적으로 힘을 줘야 하고… 아… 배가 튀어나올때마다 내 귀에만 알람이 울리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문제는… 나랑 드럽게 안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하여 저 코너만 돌면 약속 장소인데,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고 하이힐 뒷굽만 죄 없는 보도블록에 콩콩 찍고 있었다. 그때 어깨너머로 커다란 손이 다가와서 내 눈을 가렸다.


 “누구게?”


그래… 나는 도대체 무엇이 부끄러워서 그 걸음을 떼지 못했던 것인가. 세상에는 이렇게나 쪽팔린 일이 많은데… 어떻게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땐 몰랐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20년째 모름)

하지만 나도 딱히 그와 다를바가 없었다. 쪽팔림이고 나발이고 일단 내 보잘것없는 눈두덩이 위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우면서도 거친 그의 손바닥만이 중요했다. 그의 손에서 내 코 위로 스치듯 지나가는 시더우드 향이 더 중요했다. 부끄러움 따위 개나 줘버리고…


내가 질문을 씹고 그의 손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하자 그가 슬며시 손을 떼버렸다. 하아… 손 내놔. 그 손 도로 내 얼굴 위에 올려놔. 라고 말하려는 순간 문득… 아… 그러고 보니 나 숨어있었는데?


 “선배님, 나 여기 숨어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숨을 거면 꼭꼭 숨어야지. 얼굴만 숨으면 안 되지. 강아지도 아니고.”


왓?! 강아지?!?


 “선배님!!! 지금 나한테 멍청하다고 한 거예요?”

 “아닌데??”

 “맞잖아요!! 강아지처럼 멍청하다고!!”

 “아니, 강아지처럼 귀엽다고. 오늘 예쁘다고.”


어… 그렇… 네? 뭐라고요?


 “선배님. 뭐라고요?”

 “모임 가자.”


아니, 한 번만 다시 말해주세요.


우리는 그날 독서 모임을 했고, 모임이 끝나자 그가 나를 바래다주며 말했다.


 “국주야, 나 나머지 취한 인간들 택시 태워 보내고 다시 올 테니까 자지 말고 기다려.”


그날 우리는 일방이 아닌, 쌍방이 시작되었다.


입하 감사합니다.

“예쁘다.”

그에게 저 말이 자꾸 듣고 싶어서 구입한 정장이 옷장으로 한가득입니다. 그리고 둘째를 출산하고 체중이 20kg가 늘었을 때도 못 버렸어요.

그리고 현재는 그 정장들을 다시 입을 수 있습니다. 안 버리길 잘했죠.

그의 눈앞에서 그가 좋아하는 정장을 입고, 그가 좋아하는 턱걸이를 하고 있으면 그는 아직도 저를 세상 흐뭇한 눈으로 봐줍니다.

네, 우리는 부끄러움 같은 거 모릅니다.
이전 22화 나… 신천지한테 까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