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국주 May 28. 2021

그대가 나의 로또입니다.

인생의 팔할이 장난

 그의 뇌는 90% 이상이 고퀄의 장난기로 채워져 있다. 그 퀄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으며, 일반인은 그 속도를 결코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장난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하루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 그를 데려갔다.

친구들에게 그를 보여주고 싶었다기보다는, 친구들이 그를 몹시 궁금해했다. 그런데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마냥 강제로 질질 끌려 나온 그는 그 자리에서 인사 외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는 분위기가 더 암울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밥만 먹고 그를 데리고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아니니 다를까 우리가 튀자마자 단톡방에는 분노의 톡들이 쏟아졌다.


살쾡 : 야! 꾹! 너네 싸웠냐?
두덕 : 밥 먹다 체하는 줄…  
타조 : 오 꾹 남친 왔었어? 나도 갈걸…
고슴 : 미친… 저런 사람이랑 어떻게 만나냐?
타조 : 꾹 저거는 얼굴만 보자나… 진짜 잘 생겼어?
올뺌 : 몰라 ㅆㅂ 하도 근엄해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어. 너 안 오길 잘했어.
두덕 : 어… 존나 싸우론임. 우린 못 쳐다봄.
고슴 : 와… 씨바…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살쾡 : 꾹… 너 결혼은 하지 마라.


야… 니들이 보고 싶다며…

그렇다. 그는 낯가림이 매우 심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사귀고 연애 초반까지도 그의 성향은 물론 성격조차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차분하고 조용하며 사교성이 없는 사람… 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낯가림이 심하다고,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 역시 불과 얼마전에 깨달았다.


친구들 앞에서는 그토록 과묵하고 근엄했던 그가 막상 밖에 나오니 신이 나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장소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이었다. 타인에게 피해 끼치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딴에는 조용히 입 닫고 음소거 상태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뭔 짓인지는 디테일하게 묘사하기도 싫다. 피해를 주기 싫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을… 그런 옵션은 그의 뇌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행동이 너무 튀었다. 아니, 안 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음소거 상태라고 하더라도 지하철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인간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가 너무 조용히 장난을 쳤기에 관람하는(?) 승객분들도 대놓고 웃지는 못 했다. 그들은 끅끅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입을 틀어막고 견뎌내고 있었다. 본인들이 웃고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이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만이 그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 저 망할 집중력… 늘 그렇듯 빡침과 쪽팔림은 내 몫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다음 역에서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 나갔다.


 “선배님, 우리 다른 거 타요.”

 “왜?”


왜냐고? 지금 왜냐고 물었니?


 “선배님, 그… 사람 많은 데서 그런 미친… 하… 그런 짓을 하면 안 돼요.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너무 쪽팔려요. 다음 열차 안에선 그러지 말아요. 그럼 우리 또 내려야 하고 그럼 우리 오늘 안으로 집에 못 가요.”

 “...... 아냐, 아무도 모르던데…”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어요!!!

키 크고 덩치 크고 존재감 쩌는 너같은 인간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데!!! 하… 그래요. 나빼고는 다 즐거워했으니 해피엔딩인 걸로…


그렇게 지하철을 탈출하여 학교 후문에 도착한 우리는 지친 마음을 쉴 겸 카페에 들어갔다.


 “국주야, 뭐 마실래?”

 “저는 라떼요.”


잠시 후 그가 라떼와 레몬 에이드와 종이컵을 들고 왔다. 그러더니 종이컵에 레몬 에이드와 라떼를 조금씩 따르는 것이었다?!? 왓… 잠깐… 너 또 왜 그러는데?? 그리고 날 보고 씩 웃더니 그것을 마셨다?! 그것도 넘나도 맛있게... 허… 이런 ㅆ… 도대체 왜… 경악에 말을 잇지 못하는 내 면상을 앞에 두고 한 컵을 전부 맛나게 마신 그가 말했다.


 “국주야. 이렇게 마시니까 진짜 맛있어.”


안다. 저 말에 속으면 등신이다. 레몬 에이드에 라떼를 섞으면 어찌 되는지 상상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확신에 찬 얼굴과 망설임 없는 행동을 보니 ‘진짜…?’ ‘혹시 진짜?’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 나는 그때 등신이었다.


 “정말요?”

 “응. 국주 너 이거 이렇게 먹어본 적 없지?”


당연히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데 내 앞에서 너무 맛있게 먹는 그를 보니... 흔들렸다. 궁금했다. 먹어봐도 될 것 같았다. 저 사람은 저렇게 맛있게 먹었는데… 나도 최소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셨다. 마셨더니…


 “왓… 씨바… 이런 #^$$£*%*££¥...”


온갖 쌍욕들이 라떼&에이드와 함께 튀어나왔다.


 “국주야, 아무리 화가 나도 오빠한테 커피를 뱉으면서 씨발이라고 하면 안 되지.”


놈은 이렇게 말하면서 씩 웃는 것이었다.

와... 저 샠… 진심으로 화가 났다. 아니, 저 얼굴을 저 따위로밖에 사용을 못 하나?? 저 예쁜 얼굴로 간사하게 사람을 속이고!!! 사악하고 몹쓸 장난을 치고!!! 그걸 보면서 웃고!!!! 하면 내가 용서를 해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와… 진정 불공평하다. 시작부터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사실 알았다고 하더라도 속아줬을지도 모른다. 나라는 인간은 그러고도 남는 인간이었다.


 “아니에요. 선배님한테 욕한 거 아니에요… 이 씨발라먹을 음료수한테 한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카페에서 그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또 같이 그의 집으로 왔다. 이제 각자 집으로 갈만도 한데… 그 당시에 우리는 좀처럼 헤어질 생각을 안 했던 것 같다. 그의 집에 도착한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의 냉장고를 열었다. 뭐 거의 내꺼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설레임이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아까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쁨이 막 샘솟았다. 그랬건만... 뚜껑을 열었더니 김이 푸우우욱 새는 것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설레임 안에서 공기가 피이이익 하고 새어 나왔다. 하… 그것은 설레임이 아니라 설레임 봉지 풍선이었다. 놈은 안의 내용물을 다 비우고 나서 그 안에 바람을 불어 빠방하게 만든 후에 다시 뚜껑을 닫아서 냉동실에 넣어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를 쳐다보니 그가 또 웃고 있었다.


 “선배님... 이거... 일부로 준비하신 거예요?”


그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와... 울기까지 한 거야?


 “응… 나는 우리 국주가 그것을 열어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저 시키를 때리지 않은 게 참으로 용하다.


그리고 며칠 후 그가 나에게 이런 사진을 보냈다.

그대가 나의 로또입니다.

뭐 대충 로또를 샀는데, 몹시 실망스럽다는 뜻이었다. 그냥 ‘내가 로또를 샀는데 다 꽝이다.’ 라고 말로 할 수도 있는 것을… 카메라를 설치해서 굳이 사진을 찍고, 컴을 켜서 포토샵으로 그 사진에다가 저런 정성스러운 낙서를 한 후에 나에게 보냈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었으니까…


그때는 몰랐다.

인생의 팔할이 장난인 그가 보내온 이 사랑스러운 사진을 내가 20년째 보관하고 있다가,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그리고 그때 그의 사진들을 보면서 20년 후에도 이렇게 웃을 줄은…

진짜… 따라다닐 만했다.


아! 그리고 나는 그날 이렇게 답을 보냈다.


선배님이 내 로또예요. 난 로또 당첨 ^_^



그 후 이야기 1

저도 이제 경력이 꽤 있는지라 그의 장난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진짜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가끔씩…


그의 회사는 재택근무가 기본입니다. 출근을 하려면 신청을 해야 한다나요. 며칠 전이었습니다.


 “여보야, 나 내일은 출근해.”

 “정말? (기쁨을 감추며) 내일 여보야 출근해요? (재확인).”

 “응. 방금 회사에 출근 신청까지 다 해놨어.”


아싸. 저는 다음날 잔뜩 신이 나서 운동을 마치고 신재희와 함께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신랑이의 뒷담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밀린 게 많았으니까요. 커피를 뽑으면서도 신랑이의 뒷담화를 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신랑이의 뒷담화를 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신랑이의 뒷담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갑자기 신재희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쉿! 언니, 조용히 해봐.”

 “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허... 설마... 어디서?”

 “... 형부 방에서...”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나한테는 분명 출근한다고 했는데… 심지어는 출근 신청한 걸 보여주기까지 했는데…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신랑 방의 문을 살짝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상을 부여잡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그가 있더군요.


 “여보야... 출근한다면서요.”

 “푸흡... 취소했지.. 큭큭.”


우와... 정말 당신... 설마 일부로 그런 거예요??


그 뒤로 저는 누군가를 초대하면 여보야를 부르며 온 방문을 다 열어봅니다. 그리고 없는 걸 확인하고 시작(?) 합니다.



그 후 이야기 2

낯가림이 심한 그의 장난은 직계 가족 한정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직계가족에는 울 엄마, 즉 본인에게는 장모님도 포함이지요.


어느 날 친정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고 제가 운전 중이라 그 전화를 그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 수 없이 한없이 불편한 사위에게 잔소리를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스불 껐느냐, 방 불은 다 껐느냐, 콘센트는 다 뽑았느냐... 이런 시덥지 않은 잔소리들이었습니다. 모든 질문에 넵, 넵, 대답만 하던 그가... 콘센트는 다 뽑았느냐는 질문에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입니다.


 “넵. 냉장고 콘센트까지 싹 다 뽑았습니다. 장모님.”


순간 수화기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정적.

어머니는 처음 당해보는 도발에 적잖이 당황하셨던 것 같습니다. 말까지 더듬으신 거 보면...


 “그… 자네는... 그... 냉장고까지 뽑으면 어떡하나…

냉동실 음식은…”


저는 추후 어머님께 차근차근 설명해줬습니다.


 “엄마... 김서방이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마요. 전부다 장난이고 농담이니까.”


장난이 쉽게 먹힌다 싶으면 횟수가 올라가고, 반응이 재미있다 싶으면 강도도 올라갑니다. 보니까 엄마한테도 예외는 아닌 거 같으니 절대로 말리지 말아요. 한번 말리면 끝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우리 가족들도 그의 장난에 적응이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두 그의 장난을, 그리고 그를 좋아합니다. 내 편은 아무도 없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