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환자들이 방문하는 낮의 응급실과는 다르게 밤에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은 대게의 유형이 정해져 있는데, 바로 대부분 술을 마시고 다친 분들이다. 술을 마시고 넘어졌어요, 술 마시고 말싸움하다가 맞았어요, 술 마시고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어요 등 술에 의해서 생기는 사건 사고들이 90프로쯤 되는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환자분 한분이 119를 통해서 응급실에 오셨는데 정말 머리가 피범벅이었고 두피가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상처가 심각해 보여서 얼른 뛰어가서 환자를 봤다. 다행히 말도 잘하시고 걷기도 잘 걸으셨다.
“환자분 이거 어떻게 다치신 거예요?”
“아 제 머리를 소주병으로 깼어요.”
“소주병으로 머리를 맞으신 거예요?”
“아니요 저 혼자서 그랬어요.”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경찰이 아닌 의사에게는 사건의 경위보다 환자의 상태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것은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보기로 하고 얼른 간단한 신체검사를 했다. 다행히 별 문제가 없었다. CT도 찍었다. 두피는 상당히 크게 찢어졌지만 다행히 뇌출혈은 없었다. 유리조각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레지던트 선생님께서 두피를 봉합해주셨다. 그리고 퇴원을 기다리는 찰나에 나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이유 없이 소주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 칠리는 없고 혹시나 이게 자살시도가 아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환자분은 딱히 우울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자살시도가 아니라는 것을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바쁘고 할 일도 많은 응급실이지만 이 질문 하나가 사람 한 명을 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달려가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요즘 우울하지는 않으세요?”
“예? 아니요”
“혹시 어떤 이유로 본인 머리를 내려치신 거예요?”
“아아.. 술 먹으면 가끔 머리로 소주병을 깨는데 오늘은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잘 안 깨지더라고요 허허”
.. 이렇게 호탕하신 분이 우울증이라니..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얼마 안 있어서 환자분은 퇴원하셨다. 퇴원 전에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머리로 소주병을 깨는 행위는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다. 꼭 지켜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던 어느 날 환자 한분이 구급차를 타고 왔다. 가족들도 같이 왔다. 배우자와 다툰 뒤 술병과 함께 의식이 없고 구토를 하는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면제 과다복용에 의한 자살시도가 강력히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약물 과다복용과 같은 경우에는 약물에 따라 해독제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약물을 과다 복용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구조대원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주변에 있는 약물들을 싹 다 가져왔다고 한다. 콧물약, 해열제, 아스피린.... 단시간 내에 이런 현상을 유발할 수 있는 약물들이 아니다. 특히나 통도 거의 꽉 차 있어서 드셨어도 몇 알 드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들렀던 병원들에 모두 전화를 걸어서 복용하는 약을 물어보고 보호자한테도 집안을 싹 다 뒤져서 혹시라도 약봉지 같은 거 있으면 가지고 오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최근에 입원했던 병원에서도 수면제나 신경안정제는 드시는 게 없다고 하고 집안에서도 추가적으로 발견된 약봉지는 없었다. 그러던 중 피검사 결과가 나왔다. 정상치보다 훨씬 높게 치솟은 에탄올 수치를 제외하면 모두 정상이었다. 그냥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거였나... 그래도 레지던트 선생님은 알코올 과다복용에 맞는 치료를 하는 한편 혹시라도 다른 약물을 드셨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을 계속해서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 최근 다녔던 병원들에 전화를 모두 걸어서 약 정보를 조사하던 중에 환자분은 멀쩡한 상태로 깨어나셨고 얼마 뒤에 걸어서 퇴원하셨다. 한편으로는 수면제를 드신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그 밖에도 정말 다양한 분들이 이 '술' 때문에 오신다. 이 중 몇몇 분들은 넘어져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고 해서 CT를 찍은 것에 대한 큰 불만을 가지기도 한다. 이해는 한다. CT는 꽤나 비싼 검사이고 잠시 넘어진다고 해서 뇌출혈이 생길 가능성은 낮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머리를 다치신 분들에게는 CT를 꼭 찍는 것을 권한다. 예전에 한 교수님께서 내게 해주셨던 이야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레지던트 시절, 한 학생이 응급실에 왔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 학생이었고 의식도 멀쩡하고 두통도 없었다. 그리고 집이 그렇게 잘 살지 못한다며 병원비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CT가 지금보다 훨씬 비싼 검사였고 환자 상태도 괜찮아서 교수님은 그냥 퇴원을 시킬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본 윗 년차 레지던트 선생님은
“네가 걱정해야 될 것은 환자의 주머니 사정이 아니라 환자의 목숨이다.”라며 그 당시의 교수님에게 불 같이 화를 내었고 결국 환자는 CT를 찍었다. 그리고 그 CT에서 뇌출혈이 발견되었다고. 만약에 그때 그대로 퇴원했더라면 환자는 젊은 나이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고 교수님께서는 아마 면허를 잃으셨을 것이다. 낮은 확률이라지만 머리를 다쳤을 경우 뇌출혈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CT가 비싼 검사이기는 하지만 목숨보다 비싸지는 않다.
그 날 하루도 술 드시고 오신 환자분들이 80프로 이상이었다. 건강한 음주문화가 가득한 세상이 오기를 빌면서 오늘 글을 마쳐본다.